사슬
차가운 땅을 파헤쳤다. 굳은 지렁이가 있다. 달팽이의 등껍질이 있다. 더듬이 한 쌍이 있다. 전쟁의 잔해이다. 곤충의 무덤이다. 찾고 싶은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있다. 몸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 가 이제 머리 위로 하늘만 보였다. 발끝에 새각류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새각류? 물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각성과 찰나가 만나 시계의 흐름을 휘저었다. 세계를 뒤바꿨다.
구덩이는 호수가 되었다. 새각류를 따라 이동한 두더지꾼이 첨벙거리는 동안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구경꾼들의 띠는 둥근 원을 만들었다. 그녀는 완전히 포위됐다.
여자가 기도했다.
나는 아는 게 없어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는 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도와주세요.
미끌거리고 따끈한 점액질의 호수 위에 얼굴만 간신히 내밀어 떠 있는 여자를 살려준 구원자는 1억 마리의 물벼룩이었다. 물벼룩 1억 마리가 여자의 미동을 살피고 있었다. 여자가 눈을 뜨자 물벼룩들이 대동단결하여 움직였다. 그들의 언어는 단순하고 획기적이었다. 물의 파동을 만들어 인간의 촉각에 신호를 보낸다. 물결이 몸에 닿자 의미화되어 촉각으로 하여금 의미를 인지하도록 했다. '기가 막히는군.' 여자는 생각했다.
물벼룩 1억 마리와 감각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물벼룩 1억 마리는 모두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알이었다. 여자는 두더지꾼이라고 불리는 곤충 채집가였다. 이제 고맙지만 무엇을 찾던 중이라 떠나야 한다고 했다. 물벼룩은 파동을 일으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두더지꾼이 화가 나 그동안 참았던 언어로 소리쳤다. 큰 소리를 지른 뒤 물벼룩 1억 마리를 채집망에 걸러 손으로 짓뭉갰다. 전쟁에서 승리한 두더지꾼이 호수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이 되어 호수를 다스렸다. 여왕이 단위생식으로 여름 아이를 낳았다. 한없이 예쁜 여름 아이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배영을 즐겼다. 물결이 세계의 정보를 여름 아이에게 속삭였다. 여름 아이는 각성과 찰나의 번개를 맞고 세계를 이동했다.
차가운 땅을 헤치던 두더지꾼은 깊은 구덩이에서 여름 아이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