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지만 끈질기게
행복이나 불행을 감정의 단위로 정의하고,
생애 모든 순간들에 대한 기준을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본다면
행복에서 불행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의 이동 거리에서 보이는 수많은
감정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오래전,
수잔이 사귀던 남자와 그럭저럭 짜릿하고 풋풋한 시간을 짧게 보낸 뒤 파멸은
비교적 빠르게 찾아왔다.
순진했던 수잔에게 사귀던 남자의 식어가는 열정은
민망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수잔의 자존감과 자존심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빨간 신호를 울려댔다.
급기야 울고, 소리 지르고, 이별을 통보하고, 매달렸다.
수잔에게 불행의 신호는 미세하게 전달되었다.
남자의 극도로 세심했던 배려가 지친 말처럼 느려지다 멈추어 섰다.
달리던 말이 지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연애 감성에 충만했던
당시의 수잔은 볼 수 없었다.
진실은 자주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처해진 상황에 따라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이기에.
뛰지 않는 말을 보며, 안타깝고 서글펐던 수잔은 불행에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사랑은, 해프닝으로 시작해서 수평적인 관계로의 이행이라는, 지켜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관계적 숙명이라는 것을 그때의 수잔은 몰랐다.
진실은 자주 모습을 감추기에.
굳이, 불행한 순간이 아닌, 불행해지는 순간이라는 타이틀로 이야기를 풀고자 했던
이유가 이쯤 생각이 난다.
불행이 상황이 아닌 감정상태라는 가정하에, 불행으로의 이동 간에
어떠한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는지, 어떻게 불행한 순간으로 다다르게 되는지 궁금했다.
이별은 상황이지만, 또한 감정이었다.
이별이라는 불행에 닿기까지 수잔은 서글픔과 섭섭함, 초라함, 분노, 미움, 자기 파괴,
좌절, 미련.
불행이라는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수잔의 감정은 복잡한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수잔의 모든 기운이 쇠했을 때 비로소 불행한 순간은 찾아왔다.
수잔의 생애 전반에서 이렇듯 불행해지는 순간은 여러 모습으로 찾아왔는데,
다행히 수잔은 어느 작가의 문장에서 이러한 인생의 아이러니를 설명하는 듯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 오늘날 우리 세상의 모습은 레오파르디의 마지막 시 <금작화>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생명을
절멸하는' 베수비오 화산 기슭이 보여 주는, 삭막한 돌만 잔뜩 있는 음울한 풍경과 너무도 비슷하다.
거의 죽음뿐인 세상이다.
'우리 세상은, 덧없지만 끈질기게 퍼지는 금작화 향내일 뿐이다.' -
수수께끼가 수잔의 생애를 쫓는다.
수잔이 무척 애달파할수록 아마도 이 쫓김은 강렬해질 것 같다.
수잔은 기억해낸다.
덧없지만 끈질기게 가야만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