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너머에 희망이 숨어있었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며

by kseniya

사람들은 무언가의 벽에 부딪혀 좌절감이 밀려오면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절망한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좌절의 순간, 그 절망 너머에 숨어 있는 희망을 맛 볼 겨를도 없이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자리가 잡혀 안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 imf가 터졌다. 그 해 여름에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동안 쌓아놓은 학업과 수많은 추억들을 남기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바람 잘 날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항상 내가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하루는 무료 하기 짝이 없었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내 수중에 단돈 만원이 들려져 있었다. 친구를 만나고 밥 사 먹고 커피 마시고 나면 없어지는 돈이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조차 만나기가 겁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때인 거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한 좌절감을 느끼던 순간이....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남들은 참 쉽게 쉽게 가는 길 같은 인생이 나에게는 더디고 힘겹고 고단할까? 불평등한 인생이라고 자학을 하는 시간 동안 비루한 변명거리만 찾고 있었다.

사십에 나를 낳은 나의 부모님은 이제 여력이 없다. 늙어가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할 판인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눈칫밥은 늘어가고 하루하루 죽을 맛이었다.


그러던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를 찾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 속에 목소리는 생각지도 않았던 마리나의 러시아 친구 이다였다.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으로 놀러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마리나를 만나러 왔다가 나에게도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이다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그 당시 거대한 러시아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동대문 운동장으로 약속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처음으로 가 본 그곳은 신천지였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그쪽 골목길에 형성되어 있는 러시아 시장은 나에게도 생소했다.

거대한 러시아 전역에서 온 노브이 루스키들이 거리마다 활보를 하고 다녔고, 그 양 옆으로 러시아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 회사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밖에서는 러시아 교포들이 줄줄이 나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한국 속의 작은 러시아였다.

이다는 그들 중 한 러시아 교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는 나를 무척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자신들과 같은 교포는 아닌 것 같은데 전형적인 한국 사람인데 러시아말로 조잘조잘 되고 있는 게 영 신기한 것처럼 말이다.

그 사무실의 젊은 사장은 이다와 내가 러시아말로 이야기하는 대화를 듣고 나서, 생긴 건 한국 사람인데 러시아말을 하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내게 러시아 교포냐고 물어보았다. 나의 짧은 러시아어는 그나마 억양과 발음이 좋아서 언틋보기엔 그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말이다.


미국에서도 미국 교포와 한국 사람들의 화장법이나 옷 입는 센스가 미묘하게 다르듯이 한국 국적인 사람과 러시아 교포 사이에서도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살아온 환경이 틀린데...

시대의 흐름상 솔직히 그때 한국 사람이 러시아말을 할 줄 아는 것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래도 러시아 생활회화가 능숙해서 그들이 볼 때는 러시아 교포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다와 수다를 떠는 와중에 그 회사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혹시 통역일을 해 볼 의향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잔머리의 대가인 나는 그 당시 여자 대졸 초임이 88만 원 정도 할 때였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러시아들 교포 월급이 150 만원 정도였다. 거기에 숙소비와 세 달 만에 비자 갱신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는 왕복항공권까지 챙겨주고 있던 실정이었다. 나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87만 원만 줘도 땡큐 하고 일을 해야 할 처지였지만, 밑져야 본전인데 나의 희소성의 가치를 믿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겁 없는 배팅을 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교포들에게 주는 월급이 150이면 나는 비자에 결격사유가 없는 내국인이니 그 메리트를 이용해 가감하게 배팅을 했는데... 먹혀들어갔다.

이래서 사람은 죽으란 법이 없나 보다.

과감한 나의 배팅 덕분에 나의 첫 아르바이트로 생각했던 나의 첫 월급은 200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아이엠에프가 시작되던 해에 나는 월급을 이백부터 시작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다와 자리를 옮겨 사장님과 식사를 하며 이다는 자기 덕분이라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기는 쉬운 손이라면서 러시아 속담에 료까야 레까라는 말이 있다. 뭘 해도 쉽게 잘 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이었다.

인정은 하지만 항상 이다는 그 잘난 척이 문제였다. 러시아에 있을 때도 러시아 특유의 교만함이 묻어나 있는 친구였다. 자긍심이 많은 건 좋은데 항상 그 교만함이 문제였다. 하긴 나도 이런 말하기는 이다 입장에서 보면 교만함으로 볼 수도 있으니 막상막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기 때문에 내가 취직을 하게 되었다고 쉴 새 없이 자랑을 해댄다.


그 날 따라 이다가 감기에 걸려 마리나가 살고 있는 이천까지는 무리지 싶어 우리 집에서 재워 보내기로 했는데, 밤새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러시아에서 온 손님이라고 새 이불을 내어준 엄마는 러시아 사람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로 인해서 아직까지도 그날의 이불 이야기를 한다.

그 후로 몇 년 뒤, 종원이가 누나 티브이에 이다가 나온다고 한 번 틀어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로 우리가 고 있는 그 이다가 티브이 브라운관에 배우로 나왔다.

우리와 같이 러시아에서 지내던 친구가 한국에서 재연배우가 된 것이었다. 재연배우 중에 러시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이다는 주연급이었다.

일요일마다 티브이 서프라이즈가 방송되면 나오는 이다가 신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삶을 열망하던 이다는 한국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나 역시도 가진건 배짱뿐인 나의 탁월한 배팅 덕분에 당분간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간만 일을 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출발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줄 거라고는 그 당시는 나를 비롯해 아무도 몰랐다.

삶은 살아볼 만하다는 걸 느끼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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