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에는 책가방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실내화가 들어있는 신발주머니를 비롯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의 거의 모든 일과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도시락은 빠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는 점심과 저녁까지 두 개의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도시락이 딱히 특별 날것도 없건만,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의 도시락이 생각나는 것은 그날의 추억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녔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의 시대는 분명 고단한 시대였다.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는 일제 치하에서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학교 수업을 들어야 했고, 일본의 잔재인 검은 교복을 입고 일본인처럼 살아가야 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학도병이라는 이름하에 조선의 학생들을 강제로 징용으로 끌고 갔다. 해방 후,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마을의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아버지도 전쟁터에 나가야 할 처지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학에 집에 머무르고 있던 아버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난히 넓었던 시골집 마당에 동네 아이들이 잣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여러 머슴을 거느렸던 그들의 아이들이었다.
툇마루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던 아버지에게서 그날의 비극을 알 수 있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나무 잣대가 날아가 아버지의 한쪽 눈에 박혔다.
할머니의 말로는 그날 엄청난 피가 마당에 솟구쳐 올라왔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한쪽 눈은 세상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는 그렇게 징용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그 당시에 끌려갔더라면 죽어서 돌아왔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눈 한쪽을 내주고 목숨을 건진 것이다.
한쪽 눈을 잃었다는 사실로 아버지는 자존감을 잃었다.
부족함 없이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아온 앞길이 전도유망한 청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예술적 기질이 남달라 아버지 손에만 가면 모든 것이 특별해지는 타고난 재주꾼이었다.
노래와 장구 솜씨도 탁월해 한량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아버지 자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꽃이라는 시를 쓴 김춘수 작가의 제자로 말과 글에 능한 문학도이기도 했다.
일본어를 며느리의 박사학위 논문의 원서를 번역해 줄만큼 원어민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책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달필이었던 아버지였다.
재주가 많으면 고생한다던 옛말이 나의 아버지에게서는 비켜가지 않았다.
용감하진 않았지만 정직했던 아버지의 삶은 굴곡진 현대사의 모든 시련을 받아내며 견뎌낸 삶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한 자식이었다. 아버지의 모든 삶은 자식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자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힘을 뽑아내고 있었다.
술이 들어갈 때만이 아버지의 숨겨진 본성이 드러나곤 했다.
낭만을 얘기하고 철학을 얘기하는 아버지는 술이 깨면 현실에 직면한 고단한 일터로 나갔다.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아버지가 소풍 가는 날에 김밥을 싸 주지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미 도시락 안에 김밥이 들어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사소한 거에 더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무 거리낌 없이 열어 재치는 도시락 뚜껑 소리에 나의 손은 도시락 통만 꽉 잡고 있었다.
친구들의 성화에 도시락 통을 열자마자, 형용색색으로 볶아낸 밥에 노란 계란지단이 이불처럼 덮여있는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김밥이 아니라서 실망이라기보단 그나마 오므라이스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서로 자기 김밥을 가져와서 내 오므라이스를 한 입씩 먹었다.
그렇게 김밥 없는 소풍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특별한 날을 제외한 나의 도시락은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의기소침해질 때가 더 많았다.
장남인 오빠에게만 집중되었던 엄마의 편애는 도시락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하루에 세 남매의 도시락을 싸 대려 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갔다.
분명 오빠의 도시락에는 들어가 있는 계란이 나의 도시락에는 없는 것이다.
사소한 차별이 지속되면 분명 상처가 된다.
입이 나발로 나와있는 내 심기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를 챈 건 아버지였다. 엄마에게 나의 부당함을 언질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우유가 그 당시에는 작은 병에 담겨 배달이 되어왔다. 그 우유를 마실 수 있는 건 장남의 특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치사스럽다.
그렇게 음식으로 마음이 더 상했던 건 막내인 나만 유독 제외된 것이었다.
오빠는 장남이라서, 아들이라서.
언니는 몸이 약해서.
엄마는 그런 언니한테 쩔쩔맸다.
나는 너무 건강해서, 막내라서 막 뒹굴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엄마는 나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다.
오빠도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반쯤 남긴 우유를 엄마 몰래 나를 불러 마시게 하곤 했지만 , 우유 반 잔이 나의 상한 마음을 메꿔주진 못했다.
엄마의 지독한 무관심과 나의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그날도 뽀로통해서 별 기대 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하얀 밥 사이에 까맣게 선명하게 그려진 검은 하트.
그 순간, 친구들의 입에서도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옮겨진 검은 통깨로 그려진 하트는
내 심장 안에 들어와 내 심장과 함께 뛰고 있다.
아! 나의 아버지!
나는 세상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 한 사람인 이런 아버지를 가졌다.
돈이 아닌 마음으로 별을 따다 준 사람.
어떻게 세상을 상대로 삐뚤어질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저렇게 부드러운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너같이 강하고 단단한 딸이 나올 수 있냐고...
나의 부러질듯한 단단함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아버지의 부드러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