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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Oct 22. 2022

 아버지의 김밥

소풍가는 길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소풍 가는 날은 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기다리던 날이었다. 혹시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일 비가 오지 않을까?

밤새 불안해하며  밤잠을 설치던 같은 시대 살던 같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지 않았을까.


이렇다 할 먹거리도 놀거리도 없던 시절..


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정해져 있던 소풍 가는 날은 그 시절 누구나 기다리던 연례행사였다. 고작 , 가는데라고는 한 시간 내내 걸어서 사대문 안인 경복궁이나 덕수궁이었지만, 십대의 수다는 장소불문 거리 전체를 들석들석하게 만들었다. 전날 비가 올까 노심초사하던 아이들은 그 걱정했던 밤이 생각도 나지 않게 화창하게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목적지를 향해 활기차게 걸어 나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딱히 소풍이라는 날보다는  사생대회라고 해서 그림 그리기 대회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그 지겹도록 다니던 고궁이,  동네에서 걸어가도 될 만큼 지척에 있었던 그 무거운 역사적인 장소들이 우리들에게는 경이롭다고 감탄을 할 정도의 역사적인 상징이 아닌, 동네 한구석에 붙어있는 갈 때 없거나 특별한 날에만 찾는 그런 장소였다.


내 나라를 떠나 철새처럼 살면서 가장 그리운 것은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한국의  고궁이었다. 실현될 꿈인지 모르나,  나의 노후는 고궁 근처의 동네에 살면서 사소한 행복을 누려보는 것이지만, 내가 살던 옛 동네의 집값이 상상 이상으로 너무 올라버려, 아마도 실현 불가능한 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계란 하나로도 훌륭한 밥반찬이 되었던 시절, 그날은 모든 먹거리가 총출동하는 날이기도 했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삶은 란과 사이다 한 캔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거기에 각종 과자들과 캔디가 어우러지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시기였다.

부푼 설렘의 정점은 점심시간에 먹는 김밥이다. 지금은 어느 마켓이나 아져 나오는 각양각색의 김밥들이 즐비하여, 아무거나 먹고 싶을 때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나 때우는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음식이 되었지만, 그 당시의 김밥은 어느 가정이나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소풍 가는 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김밥이었다.

달그락 소리가 나는 도시락통 뚜껑이 열리면, 네 집 내 집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끔, 조금은 여유로운 친구의 집에서 싸 갖고 온  소고기가 들어간 김밥이 드문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소박한 김밥이었다.


초록은 시금치요,  빨강은 당근이었다.


어느 집과 마찬가지로 형제들 중 소풍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형제들의 도시락도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소풍을 가지 않는 형제들도 마음이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소풍 전날 , 엄마는 동네 시장을 둘러 김밥에 들어갈 재료들을 사 가지고 다. 우리 집은 누구도 만들어 놓지 않은 비공식적인 법칙이 있었다. 김밥을 만들고 써는 일은 아버지의 신성한 특권이었다.

전날 재료를 손질하고, 다음날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와 밥을 짓는 일은 엄마의 담당이었고, 그 재료가 완성이 되면 아버지 앞에 모아졌다. 그럼 그때부터 아버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손을 씻고 정성스럽게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그 옆에 역시 내 입으로 김밥 꼬투리가 쉴 새 없이 들어온다. 바쁜 아침, 그렇게 아버지는 스무 줄 남짓한 김밥을 싸 놓고 서둘러  일터로 나간다.

재료라고 할 거 까지야 없는 평범한 김밥이지만,  우리 집 김밥에는 시금치 대신 쑥갓을 조물조물 참기름에 무쳐 들어간다. 별맛을 모르겠는 시금치보다 쑥갓 향이 김밥의 풍미를 더해 준다. 옆에서 어부지리로 얻어먹는 김밥의 꼬투리 또한 별미다.



시간이 지나고 계란이 흔해지면서 아버지의 김밥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기름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계란을 풀어 김밥을 넣고 돌돌 말아내는  일명 계란말이 김밥을 그 당시에 만들어 주었다. 그 앞에 무지 대신 양배추를 게 썰어 케첩을 뿌려  접시에 예쁘게 담는 건 덤이다.

지금에서야 여기저기 분식점에 하나의 메뉴로 나오지만, 그 당시엔 이마저도 꽤나 파격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생각에 음식 장식에 신경을 엄청 많이 썼다.


음식은 정성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음식 하는 걸 즐겨하지 않는 거 같은  무심한듯한 엄마의 음식맛은 정성과 비례하지 않았다. 조금은 투머치인 아버지의 식보다  아주 금 더 맛있다.

타고난 천성이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실 살아가면서  강하게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인생은 타고나는 순간부터 불공평하다.

그걸 아버지도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는지 지나다가 넋두리 식으로 한마디 거든다.


 "이상하게  엄마의 저 맛은 안 난다 말이야."


그 대표적인 엄마의 독보적인 음식은 알맞게 우려진 다시 국물에 유일한 고명인 호박볶음 하나만 달랑 얹어진 엄마표 잔치국수와, 적당하게 풀어진 장의 깔끔한 꽃게탕의 맛은 엄마의 맏손주까지 인정한 최고의 엄마 음식이다.

아버지의 정성이 엄마의 손맛을 이기지 못하는 음식들이다.



자식들을 위한 부모의 밥상이 주는 이 흐뭇한 행복감!


내가 지금 부모님들의 그때  나이가  되어, 그 맛을 흉내 내어  보지만 언제나 살짝 그 맛을 못 따라잡는다. 그 이유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시간과 따라잡을 수 없는 부모님의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 아녔을까?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그때의  부모님들이 그립다. 나의 부모는 노인이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영원히 젊을 것 같던 부모님이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굽어 내일이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백발의 노인들이 되었다. 자연의 흐름이지만 그래도 슬프다.

나의 아버지가 늙어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렵다. 차별 없는 시간이 야속하다.




엄마의 손맛과 아버지의  정성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호흡이 만들어낸 우리 집 김밥. 고맙고도 그리운 시절 음식이다.

그 음식을 먹고 자라난 지금,  엄마의 손맛과 아버지의 정성을 물려받아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하듯 나의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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