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12알의 기적
연말과 새해 사이는 늘 애매한 시간이다. 끝난 것도 아니고, 시작된 것도 아니다. 마음은 이미 내년에 가 있는데, 달력은 아직 마지막 장을 붙잡고 있다.
이런 틈에서는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이야기들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미신을 잘 믿지 않는 나조차도, 요즘 SNS에서 핫하다는 '연말 포도 12알'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어딘가 아쉽다고 느낀다.
그래서 연말을 같이 보냈던 딸 집에서 떠나기 전, 우리는 테이블 아래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포도 12알을 먹으면 다음 해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연말에만 그럴듯해지는 이야기를 하나 들고서.
12월 31일 자정, 포도 12알을 먹으면 열두 달이 행복하다는 풍습은 스페인과 중남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 알씩 입에 넣으면서 ‘이번 달은 일이 술술 풀리길’, ‘다음 달엔 여행 가자’ 같은 소원을 속으로 빌면, 한 해가 조금 더 순조롭고 즐거워진다고 믿는 것.
단순하지만, "나도 해봐야겠다" 싶은 소소한 재미가 있다. 아마 포도를 입에 넣고 씹는 그 짧은 순간, 달콤함과 목에 살짝 걸리는 감각을 느끼며 마음이 바짝 집중될 것이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긴장감 속에서, 잠깐이나마 새해 설렘이 실감 나고, 열두 달을 차례로 소망하는 재미가 살아날 것이다.
나는 이미 포도를 샀다. 마트에서 포도송이를 고르며, 크기도 색도 제각각인 알들을 한참 들여다보던 순간이 지금 생각하면 진지함에 웃음이 난다. 너무 작으면 소원이 모자랄 것 같고, 너무 크면 욕심이 많아 보일 것 같은, 연말 특유의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마음속에 세워두고서 말이다.
포도는 이미 준비됐고, 테이블 아래로 들어갈 각오도 끝났다. 누가 먼저 들어갈지, 누가 다리를 접을지, 포도를 어떻게 나눌지 상상하면 벌써 웃음이 난다.
한국에서 새해는 몸 안으로 들어온다. 뜨거운 떡국 한 그릇과 함께 나이를 삼키는 방식이다. 미국에서 새해는 눈으로 확인한다. 멀리서 떨어지는 공을 보며 시간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는 식이다.
먹거나, 보거나. 그리고 올해 우리는 들어갈 예정이다. 테이블 아래로. 한국 식으로라면 조금 무례한 자세고, 미국식으로 보면 지나치게 사적인 행사일지도 모를 그 애매한 중간 지점에서.
이번 의식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딸과 남편, 그리고 딸과 함께 사는 절친이자 룸메이트까지, 네 명이 함께할 예정이다. 테이블 아래는 이미 비좁다.
누가 먼저 들어갈지, 누가 다리를 접을지, 포도는 누가 들고 있을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따라올 것이다. 테이블 아래는 원래 먼지와 잃어버린 양말이 있는 공간이지, 가족과 친구가 동시에 앉아 미래를 씹는 장소는 아니니까.
남편은 분명 "이거 꼭 해야 돼?"라고 물을 것이고, 딸은 휴대폰으로 장면을 기록할 각도를 찾을 것이다. 딸과 친구는 처음에는 웃다가, 나중에는 가장 진지한 얼굴로 포도 개수를 셀지도 모른다.
"지금 몇 알 먹었지?"라는 질문이 몇 번 오가고, 누군가는 씨를 씹어 얼굴을 찡그리고, 누군가는 자정 타이밍을 놓쳤다고 항의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테이블은 낮고, 네 사람의 무릎은 서로 얽히며 자리 차지를 할 것이다.
포도 12알은 다가올 열두 달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 밤에 우리가 씹는 것은 포도만은 아니다. 웃음과 어색함, 그리고 '그래도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마음 같은 것들. 시작은 장난 같지만, 막상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떡국을 먹고, 미국에서는 공이 떨어지는 걸 보고, 우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그 밤만큼은, 서로의 웃음과 어색함을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께서도 혹시 연말에 조금 엉뚱하게,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테이블 아래에서 포도 한 알씩 씹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열두 알을 모두 먹지 못하시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도를 씹는 순간, '올해는 재밌게 살아보자'라는 마음 한 알을 함께 삼키는 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웃음 가득한 한 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