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세상
“잠깐만 뵐게요."
문 앞에 선 그는 어딘가 들뜬 얼굴이었다.
손에 든 작은 쇼핑백엔 네이비 리본이 달려 있었고, 안에는은근히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와이프가 갔다 드리라네요. 이게… 버터계의 에르메스래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전 회사 동료가 고맙다며 건네준 선물 하나로, 우리 집 냉장고에도 갑자기 에르메스? 바람이 불었다.
요즘 세상엔 에르메스가 너무 많다.
가방 매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거? 우유계의 에르메스야."
"이건 디저트계의 에르메스네."
"식빵의 에르메스 까지?"
이쯤 되면 에르메스 본사에서
"도대체 우리 브랜드가 어디까지 갔냐"하고
회의 한 번 열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요즘 사람들은 뭔가를 설명할 때
길게 늘어놓는 걸 싫어한다.
비싸고, 희귀하고, 남들은 잘 모르는
그 특별함을 굳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한 마디로 끝내버린다.
'뭐뭐계의 에르메스'
한 마디면 다 통한다.
"그거 왜 좋은데?"
"그냥 에르메스야."
설명 끝.
묻는 순간 지는 거다.
재미있는 건,
이 표현이 꼭 최고급이나 명품에만 붙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쯤 되면 '최고'라는 의미보다
'남들보다 먼저 알고 있는 힙한 정보'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찾는 건
남들이 아는 에르메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아는, 내가 좋아하는,
남들은 아직 모르는 에르메스다.
진짜 에르메스는 돈 있다고 아무나 못 산다.
돈도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고,
담당 직원이 기억도 해야 하고,
때로는 리스트에 이름도 올려야 한다.
몇 달, 몇 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빵계의 에르메스는 줄만 서면 살 수 있다. 물론 어쩔때는 줄이 길어 포기 하기도 한다.
커피계의 에르메스는
7,000원만 내면 마실 수 있다.
세상에 진짜 에르메스는 몇 개 안 된다.
다들 뭐든지 에르메스라고 부르면,
이쯤 되면 나도 '나계'의 에르메스 아닌가.
희소성은 갑이고,
생긴 건 독창적(?)이고
성격도 독보적이다!
나는 오늘부터 내 마음속에 선포했다.
"나는 '나계'의 에르메스다."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고,
가격 매길 수 없으며,
취향도 희귀한 존재.
이왕 다들 에르메스 놀이하는 세상.
나도 내 가치를 조금 더 근사하게 챙겨봐야지.
그러니 오늘 아침 7,000 원짜리 라떼 한 잔.
이건 커피계의 에르메스라 우기기로 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조금 더 근사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다들 자기만의 에르메스를 간직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