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카페보다 밭이 더 좋았다.
남편이 귀농한 한 분을 취재하고 방송을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교사이셨던 분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야기. 그 당시에도 특별했지만, 지금도 지역에서 꽤나 이름 있는 인물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제는, 연락처도 예전 것이고, 세월이 흐르며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는 것.
한국처럼 빠르게 변하는 곳에서는,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붙잡는 일이 참 어렵다.
그런 일이 벌써 두 번째다.
얼마 전 하동을 여행했을 때도 만나고 싶었던 분을 수소문 끝에 어렵게 다시 찾아가 만났다. 그렇게 잊힌 줄 알았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선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충청도 괴산.
그저 여행 중 잠시 쉬어가려던 길이었다. 괴산은 '대학 찰옥수수'로 유명한 고장.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는 우리 식구라 집으로 돌아가기 전 옥수수를 사가기로 하고 먼저 화양계곡으로 향했다.
그런 우리 앞에 계곡 아래 조용한 카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잠시만 쉬어가자며 들어선 그곳에서, 뜻밖의 따뜻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카페 사장님이 쟁반에 옥수수를 담아내어 주셨다.
"어머니께서 밭에서 직접 따다가 쪄 주신 거예요. 한번 드셔 보세요."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달고, 고소하고, 쫀득한, 씹을수록 속이 꽉 찬 그 맛.
안 그랬겠나.. 바로 밭에서 따서 찐 옥수수.
같은 옥수수라도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맛이었다.
그렇게 옥수수를 매개로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편이 문득 물었다.
"혹시 ○○○ 씨를 아세요? 이쪽에서 꽤 유명하신 분인데요."
사장님은 반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분 동생을 잘 알아요. 동생분은 이 근처에서 유명한 작가세요. 연락 한번 해볼까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 신기한 일이었다.
사장님의 연결로 그분 동생과 연락이 닿았고,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라며 카페에 들렀다.
동생분 덕분에 남편은 찾고 있던 분과 오랜만에 통화할 수 있었다. 귀농 이후 계속해서 귀농 관련 강의를 해오셨고, 통화할 당시에도 강원도에서 강의 중이라고 하셨다. 다음엔 꼭 뵙자며 약속까지 나누게 됐다.
우리가 다시 옥수수 이야기를 꺼내며 “이렇게 맛있는 건 마트에선 절대 못 사지” 하고 웃자,
사장님이 슬며시 말했다.
"우리 어머니 밭에서 직접 따 가실래요? 저기 길 건너에 있는 밭인데…"
우리가 앉아 있는 카페 맞은편, 길 건너 옥수수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밭에서 사장님의 어머님이 허리를 반쯤 굽힌 채 옥수수 줄기 사이로 몸을 움직이고 계셨다. 한 손엔 이미 딴 옥수수 몇 개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키보다 큰 줄기 사이를 헤치며 알이 단단히 찬 녀석을 골라내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트가 아닌, 땀과 햇살이 배어 있는 밭에서 직접 따는 명품 옥수수.
사장님은 말없이 뒤편으로 가서 자루 하나와 낫을 챙겨 들고 오시더니,
익숙한 걸음으로 우리를 조용히 밭으로 안내했다.
모든 것이 예정된 듯 자연스러웠고, 모든 것이 뜻밖이라 더 따뜻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인연과 뜻밖의 선물이 한날한시에 쏟아진 하루였다.
하동에 이어 두 번째 재회.
그리고 괴산에서 만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옥수수.
하지만 오늘 가장 큰 선물은,
남편의 오랜 인연이 다시 이어진 기쁨이었다.
또 그분의 동생, '숲 철학자'로 넓리 알려진 작가님.
알고 보니 이 작가님도 방송에 여러 번 출연했던 분이었고,
우연히도 남편의 후배가 그분을 취재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말 이런 인연들이 또 있을까 싶다.
그리고 이 모든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 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카페 사장님과의 인연이었다.
이런 여행이 있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더 특별하고,
우연이기에 더 고마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옥수수보다 더 따뜻했던 사람들과의 만남.
참 선물 같은 날이었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쁨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