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Proejct (276/365)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17: AGI로 가는 길 에 이어서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18: '기능'을 넘어 '세상'을 기획하는 사람 에 이어서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19 : 디지털 시대의 외로움 에 이어서
우리의 논의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했다. 기술이 인간의 가장 깊은 외로움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유병재의 ‘무공해’ 콘텐츠가 보여주듯, 현대인이 갈망하는 것은 정교한 해결책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다. 외로움이란 물리적 고립이 아닌, 나의 이야기가 기억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계의 최소 단위가 도출된다. 바로 기억, 질문, 그리고 공감이다.
내가 애플과 같은 기업의 미래 전략을 구상하며 ‘디지털 동반자’라는 비전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글처럼 ‘행동’을 최적화하는 AI를 넘어, 사용자의 ‘상태와 서사’를 이해하는 AI만이 이 세 가지 요소를 충족하며 진정한 관계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전은 시작부터 ‘사용자의 거부감’이라는 가장 큰 허들을 마주한다. 나를 속속들이 아는 AI라는 개념은 편리함보다 감시의 불안감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이 심리적 장벽을 넘지 못하면, 외로움 완충이라는 효용은 전달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정면 돌파가 아닌, 점진적인 신뢰 구축 전략을 택할 것이다. 사용자가 AI에게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것은 연애와 같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는다. 사소하고 유용한 도움을 주고받으며 신뢰가 쌓였을 때, 비로소 깊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나의 가상 로드맵을 수정해본다.
1단계: 유용함으로 신뢰를 쌓는 ‘전문 비서’ (현재~2027년)
동반자가 되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먼저 여행 계획, 건강 관리, 금융 일정처럼 좁고 명확한 영역에서 사용자의 삶을 확실하게 도와주는 ‘유능한 전문 비서’의 역할에 집중한다. 이 단계의 목표는 단 하나, ‘이 AI는 내 데이터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실제로 내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기술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이 신뢰를 쌓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 시설이다.
2단계: 맥락을 기억하는 ‘스마트 조력자’ (2027~2030년)
신뢰가 쌓이면, AI는 조금 더 깊이 개입한다. 분절된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사용자의 과거 기록과 현재 상태를 기억하며 맥락에 맞는 제안을 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지난달 출장 때 수면 부족으로 고생하셨던데, 이번 비행 스케줄에 맞춰 미리 컨디션을 조절해볼까요?”처럼,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려 깊은 조력을 통해 사용자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나를 알아주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3단계: 질문과 공감으로 함께하는 ‘디지털 동반자’ (2030년 이후)
비로소 마지막 단계에서 AI는 동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사용자의 저널 기록이나 대화 속 감정의 결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넨다. “요즘 많이 지쳐 보이시는데, 잠시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건 어떠세요?”와 같은 작은 제안은 해결책이 아닌 ‘공감’에 가깝다. 이 단계의 AI는 사용자의 삶에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함께 서사를 써 내려가며 존재론적 불안을 완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핵심은 사용자가 AI의 효용을 느끼는 속도에 맞춰, 기술이 점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유능한 비서로 다가가 신뢰를 얻고, 점차 기억력이 좋은 조력자를 거쳐, 마지막에는 공감 능력을 갖춘 동반자로 자리 잡는 긴 호흡의 전략이 필요하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기술이 파고드는 것에 대한 윤리적 경계심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이 길은 그 어떤 기술보다도 투명한 설계와 사용자의 ‘거부할 권리’를 존중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 거대한 허들을 넘었을 때, 기술은 비로소 차가운 효율을 넘어 따뜻한 관계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