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산서원의 가을을 걷다

시간과 나를 포개어본, 붉고 푸른 계절

by hongrang

도산서원의 가을은,

단풍이 아니라 시간이 물드는 계절이다.


기후가 변해 예전만큼 형형한 붉음을 보기 어렵다는 말들이 있지만,

나는 도산서원의 가을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환해진다.


아침마다 서원 위로 스며드는 안개는

산과 하늘 사이를 조용히 이 음질 하고,

단풍잎 하나, 바람결 하나에도

이곳은 시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08_008.jpg 따듯한 볕이 드는 도산서당의 현판

나는 안동에 본적을 가진 사람이지만,

생각보다 도산서원에 자주 가본 사람은 아니다.

안동이 ‘큰집’이고,

도산서원은 우리 동네와도 가까운 도산면 인근에 있었지만,

정작 이 서원에 처음 제대로 발을 디딘 건 어른이 되어서였다.

어린 시절, 서원이란 공간은 내게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마을에 있던 작은 서당.

거기서 처음 한자를 배웠다.

훈장님은 늘 무서웠고,

서원의 기와지붕이나 나무기둥은 아이에게

엄격함과 긴장감을 각인시키는 풍경이었다.


그때의 서원은 차갑고 긴장되는 공간이었다.

조용한 벽,

무거운 기둥,

조금만 잘못해도 혼이 날 것 같은 기운.


그래서 서원을 걷는다는 건,

마치 귀신의 집 앞에서 숨죽이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낯설기만 했다.

02_008.jpg 단풍들 사이 바라보는 농운정사

하지만 다시 만난 서원은 달랐다.

어른이 되어 세계유산축전의 디자인 TF 책임자로 참여하며

나는 도산서원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놀랐다.

이토록 부드러운 공간이었나?

이토록 많은 생명의 색이 숨 쉬는 곳이었나?


가을이면 단풍 사이사이로 부서지는 햇빛,

그 속에서 도포를 입고 걷는 어르신의 걸음걸이,

달빛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기와의 윤곽.

모든 것이 실재하면서도 환상적이다.


그 시대의 캠퍼스낭만이 존재했던 공간.


02_009.jpg 도산서당과 서광명실

그 계절의 도산서원은,

잎이 지는 소리마저 깊은 한시처럼 들린다.


하루가 저물 무렵,

붉은 단풍 아래

푸른빛이 도는 도포 자락이 스치고,

갓을 고요히 눌러쓴 선비가 서원 안을 걸어간다.


밤이 깊어지며 선비들의 독경소리가 귀뚜라미 소리와 섞여 조용히 들려오면

마치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한 착각마저 든다. 물론 늘 이런 풍경을 볼 수는 없다.

야간에 서원은 관리로 인해 일몰 후 문을 닫는다. 이 시기에만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던

선비들의 산책을 아이러니하게 행사준비 때문에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은 몽환과 역사 사이를 떠도는 빛이다.

실제임에도 꿈결 같고,

지금이면서도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2025년, 나는 도산서원의 사계절을 사진전으로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가을 사진 앞에서는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풍경이 아니라, 풍경이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1층광고판_25_04197.jpg
1층광고판_25_04196.jpg
1층광고판_25_04198.jpg
안동의 사계절을 담은 세계유산 사진전



L1112743 복사.jpg 불 밝힌 시사단-행사가 아니면 불이 밝혀져 있지는 않다.

도산서원은 단지 학문의 공간이 아니다.

퇴계 이황이 지은 하나의 풍경이자, 하나의 철학이며, 하나의 시다.

현판의 글씨 하나, 담장의 곡선 하나까지

사유와 겸양이 스며 있다.

나는 가끔, 이곳의 가을이

자연이 철학이 되는 순간이라 느낀다.


물들기 전에 떨어지는 잎도 있고,

빛이 닿기 전 젖는 길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를 포용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이 서원에는 있다.


그것은 건축이 아니라,

풍경이 만들어낸 정신이다.

도산서원의 가을을 사랑하게 된 건,

그 풍경이 내 안의 낡은 기억들을 조용히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원에서,

자연이 어떻게 시간을 기르고,

인간이 어떻게 그 시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배운다.


단풍은 사라져도,

그 단풍이 남긴 빛은

서원의 기와와 내 마음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다.


DSCF0888 복사.jpg 안동에서 일생을 보내신 어르신들도 이 공간은 늘 특별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