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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Oct 20. 2024

#11.추격

#파노라마 #소설 #추격 #잔상

[엘리베이터]
"음.. 살짝 긴장이 되긴 하는구먼"
훈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통해 조금 더 젊어진 그의 모습을 보며 말하였다. 조금 전 돌아온 그의 기억에 의하면 50대 초반의 모습이었다. 눈 가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으나 조금 전 70대의 기억 속의 그를 보았기에 그 정도는 양반이었고, 머리카락은 하얀색이 거의 보이지 않은 희끗한 정도였다. 조금 더 탄력이 붙은 그의 얼굴 피부는 좀 더 단단한 선이 보이는 듯하였다.
"당신도 참.. 그전에도 병원에서 몇 번이나 봐놓고 아직도 떨려요?"
소연이었다. 그녀 역시 훨씬 더 젊어진 모습이었다. 여전히 정갈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볼록한 이마가 드러나있었고, 좀 더탄탄 해진 피부는 하얀 그녀의 피부를 더욱 매끄럽게 보였으며 그녀의 입가에는 엷어진 주름이 간간이 보일 정도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훈은 몇 번이고 그녀를 보며 안고 울었는지 모른다. 당황한 그녀는 처음엔 놀란 듯하였지만 언제나처럼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우리 첫 손자니 그렇지. 손자 케이크를 먼저 찾으러 빵집에 들러야지? 안 늦겠나?"
"아직 시간 충분해요. 당신도 참."
소연은 웃으며 가볍게 훈의 등을 쓸어내린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훈은 다소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말한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린다. 빛이 내리깔려있는 통로를 지나 유리문이 열리자 주차장이 보였다. 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소연이 커다란 나무 옆에 서 있는 흰색의 자동차를 가리킨다. 곳곳에 색이 바래고 일부가 도색이 까져 녹슬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이는 자동차였다. 훈이 조수석으로 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자 소연은 환한 미소와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번갯불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따스함이 혈류를 타는 것 같이 마음이 평온해졌다. 운전석으로 향하던 훈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흐른다. 차에 대한 기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중고가 아닌 새 차로 구매한 나름 의미 있는 차량이었다. 중형세단으로 고풍스러운 중형의 느낌을 위해서는 검은색이 좋다고 훈이 말하였지만 어두운 색은 싫다고 흰색을 고집하는 소연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그녀가 고집을 부리지는 않는데 인테리어 벽지, 옷, 그리고 이렇게 차량에 있어서는 늘 흰색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대신 다음번에는 내 맘대로 고를 거야."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 한 10년 정도 타고나서."
그녀는 다소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 차 탄지 10년이 되었구먼"
훈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스윽 바라보며 말한다.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그때 아버지한테 받았던 소나타 차가 아예 퍼져가지고 우리 돈으로 처음으로 산 차잖소. 희은이도 그.. 뭐야 햄버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보태주고."
"어머 그게 벌써 십 년 전이예요? 세월이 참.."
소연은 선바이저 미러를 황급히 내리더니 얼굴의 주름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우리 희은이도 당신을 닮아서 참 착해요. 자기 사고 싶은 거 있을 텐데. 우리는 염치도 없이 그 핏덩어리 같은 돈을..."
소연은 파우더로 입가에 주름 부분을 두드리며 말한다.
"아니 난 지금 그 말을 하려 했던 게 아닌데."
"그럼 무슨 말하려 한 건데요?"
"흠흠 그러니깐 내 말은 십 년이 지났으니 차를 바꿀.."
"아니 차가 이렇게 멀쩡한데 차를 왜 바꿔요. 그리고 아까 제가 말한 거 못 들었어요. 이 차는 우리 희은이가 아르바이트비로 보태 준 의미 있는 차라고요."
파우더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소연이 훈을 살며시 노려본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금만 더 타고 얘기 나눠보자고"
훈은 주눅이 든 채 말 끝을 흐렸다.

그때 백미러를 통해 검은색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소 투박하게 각진 차는 먹잇감에 달려드는 맹수같이 매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액셀을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엔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아.. 아니 저저.."
훈은 당황한 나머지 다음말을 잇지 못하였다. 피할 틈도 없이 사나운 맹수의 성난 뿔이 훈의 자동차의 꼬리를 세게 들이받았다. 자동차는 격렬한 반동과 함께 훈과 소연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소연은 가냘픈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차오른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볼을 타고 흘렀다. 훈도 괜찮냐는 듯 그녀를 한번 보고 기아를 P로 고정시켰다.
"괜찮아? 여보..?"
그녀는 충격과 놀람에 기절하였다.
"여.. 여보?"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는지 뒷 목이 세차게 당겨온다. 훈은 백미러를 다시 보았다.
실수였든 고의였든 뒷 차에서 누군가 내릴 거라 생각했다. 훈 역시 내려 그에게 욕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리라도 지를 심산이었다. 그때였다. 어느새 백미러로 학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평상시와 달리 그는 겁에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저놈을 오랜만에 만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순간 훈은 생각했다. 그는 뒤를 두리번거리더니 훈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어서어서 운전해. 도.. 도망가라고.."
"응?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잔뜩 상기된 채 그가 말하는 모습에 훈은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 기아를 다시 D로 옮겼다. 백미러를 보니 성난 검은색 세단은 다시 한번 들이받으려고 하는지 차를 뒤로 후진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다시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훈도 이번에는 세차게 액셀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신호를 대기하는 차들이 가로막고 있는 게 보였다.
"앞에.. 차가.."
"앞차를 밀어버리고 우측길로 빠져"
학수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다.
"하지만 앞 차에도 사람이.."
"잊었어? 이건 기억 속이라고 안 죽어 아무도. 어서 달리라고"
학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맹수가 또다시 그 뒤를 들이박았다. 커다란 신음과 함께 또다시 몸이 들썩인다. 훈은 걱정스레 소연을 보고 다시 액셀을 밟아 앞차를 밀기 시작하였다. 있는 힘껏 밟은 액셀에 엔진이 터질 것만 같은 고함을 치며 앞차가 앞으로 튕겨 나가듯 밀려났다.
"어서 꺾어"
학수는 답답한 듯 몸을 앞으로 빼 훈의 핸들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우측으로 빠지자 다행히 차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왕복 4차선 도로로 조금 전 달렸던 도로에서 절반 정도로 길이 좁아졌다. 또한 양 쪽으로 곳곳에 세워둔 차량들로 인해 길이 더욱 좁게 느껴졌다.
"계속 밟아"
학수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훈을 재촉하였다.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
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동차 뒷유리가 깨졌다.
"뭐.. 뭐야? 방금 총 쏜 거였어?"
"제.. 젠장.."
학수는 몸을 웅크린 채 언제부터 갖고 있었는지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얼른 나와라.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 넌 뭘 하고 있는 거야?"
또다시 총알이 날아와 이번엔 훈 쪽의 사이드 미러가 부서졌다.
"제.. 제길"
백미러 사이드를 통해 검은 차를 바라보자 어느새 앞유리를 깨버리고 총구를 들이미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형체를 조금 더 보려 하자 또다시 총구에서 불을 붐는다.
"수.. 숙여 저 총에 맞으면 안 돼"
학수는 훈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 와중에 훈은 정신을 잃은 소연이 괜찮은지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음에도 불편한 지 미간이 찌푸리고 있었다.
자동차는 앞 선 차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날아오는 총알로 인해 옆에 주차된 차들을 긁고 지나가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때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기억리셋?'
훈은 속으로 되네였다. 지금 이 순간 기억리셋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인지 아니면 상황만 더 악화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찾았다."
학수는 그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며 화색을 띠었다.
백미러로 보니  은 빛을 내는 커다란 손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들 속에 천사의 날개가 보였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덩굴이 얽혀있는 듯하였다.
훈이 다음 말을 묻기도 전에 차의 진동은 더욱 거세어지더니 지면 위로 차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훈이 타고 있는 차는 뜬 상태로 마치 테이프를 되감는 것처럼 뒤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백미러를 보니 공격을 하는 검은 차는 되돌아가지 않고 가까워지는 듯하였다. 그들이 바짝 닿으려는 찰나 검은색 차는 핸들을 꺾으며 그들 옆으로 비껴 났다. 그 순간 동시에 훈은 소연을 사이에 두고 창문너머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숱이 적고 살이 쪘지만 다부진 피부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씩 웃으며 총구를 들이 내밀며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였다. 그 순간 훈이 타고 있던 뒷 좌석에서 무언가 빛이 번쩍 하였다.
"천사의 거울"
차량 속 남자가 깨닫기도 전에 그 빛이 그 남자의 볼 부분을 강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들고 있던 총마저 떨구고 말았고 핸들이 꺾이며 길 가에 주차되어있던 자동차와 부딪히며 차가 360도 돌았다. 그 사이 훈이 타고 있던 차는 멀어져 갔다. 그들은 어느새 좀 전까지 소연과 한참 얘기를 나누던 도로까지 돌아왔다.
잠시 후 훈이 타고 있던 자동차는 다시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조수석에 있던 소연이 깨어나 그에게 말을 하였다. 마치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듯 좀 전까지 그들이 나누던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희은이도 당신을 닮아서 참 착해요. 자기 사고 싶은 거 있을 텐데. 우리는 염치도 없이 그 핏덩어리 같은 돈을..."
훈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작스러운 정지에 그녀의 몸이 출렁인다. 뒤에서는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훈은 그 소리에도 아랑곳 안 하고 뒷 좌석에 있는 학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주변이 새까매지며 훈이 타고 있던 차도 순식 간에 사라지고 옆에 있던 소연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훈은 또다시 놀라며 조수석에 있던 소연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후우.. 잘했어. 지금은 잠시 기억 속에서 나왔어. 이곳은 네 기억 속에 없는 장소 거든. 그러면 아무도 못 찾아. 저승사자들도"
"저.. 저승사자? 네가 저승사자라고 하지 않았어? 넌 대체 뭐야?"
훈은 두 손으로 학수의 멱살을 잡았다. 학수는 삐뚤어진 안경테를 중지로 고쳐 쓰며 또다시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훈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끄떡하면 멱살을.. 그 성질 좀 죽이지 그래"
"말해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래 사실 난 저승사자가 아니야. 내 친구를 마중 나오기 위해서 대신 나온 거라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훈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였다. 큰 혼란 속에 겨우 그의 기억과의 조우를 하며 그런대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났고, 길동무이자 저승사자로 알고 있던 학수가 갑자기 저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훈은 화가 치밀다 못해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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