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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사탕 Jan 26. 2023

1원 하나 지불하지 않은 눈밭에서

새벽에 눈을 뜨니 창밖이 유독 환해 보였다.

겨울이기도 하지만 보통 깜깜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기에 조용히 옥상으로 나가보니 역시나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 참 예쁘다'


아무도 깨지 않은 시간에 나 홀로 옥상에 서서 내려오는 눈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다.


'아침에 아이들 일어나면 좋아서 소리 지르겠네'


늘 혼자 있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또 이럴 때 보면 나도 이제 엄마가 다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그저 출근길 걱정이나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보는 시야는 아이들을 위해 세팅이 되어 있었나 보다.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분주하고도 급박한 나만의 시간에 열중하고 있을 때 따님이 먼저 일어났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옆에 없었던 엄마를 찾아 작은방으로 들어왔다. 미처 꿀잠을 마무리하지 않은 듯 내 품에 안겨 다시 잠을 청한다. 아무리 엄마한테 혼이나도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뜬금없이 사랑고백을 해 주는 아이. 내 품에 안겨 다시 콜~콜~ 잠을 자는 천사를 보며 다시 한번 하늘에 계신 분께 감사를 전해본다.




"밖에 눈이 오고 있어~"


한참을 곤히 자고 있던 아이는 '눈'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감겨있는 '눈'을 번쩍 뜨고 옥상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하늘에서 펑펑 내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흥분한 소리를 내질렀다.

잠옷을 입고 있지만 내복바람으로 나간 아이에게 옷 입고 나가자고 말을 건네니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에도 이리 빨리 움직여 주면 참 좋으련만...

역시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행동도 빨라지는 법이다. 그것이 아이라고 별 차이는 없어 보이고 말이다.


소복이 쌓여있는 눈 위로 오리 만들기를 가져와서 한껏 담아보지만 힘없이 흘러내리는 탓에 오리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까르르 거리며 돌고래 소리를 내지른다.


한참을 놀고 다시 들어오더니 젖은 장갑을 말려야 한다며 거실 바닥에 고이 펼쳐놓았다.

나름 재미있게 놀았구나. 그러면 되었다.



모처럼 출근을 하지 않는 날.

밀린 집안 일처리를 위해 외부일정이 있다 보니 분명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마음은 늘 촉박하다.


아이들과 평소 등원하는 시간은 10분 내외.

양쪽 손을 하나씩 나눠 잡은 두 아이와 함께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등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이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냥 보면 참 어여쁜 눈이지만 등원시간에는 이처럼 불편한 존재가 또 있을까.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발도장을 찍어내야 직성이 풀리고, 부지런한 동네분들이 집 앞을 잘 쓸어서 한 곳에 모아 놓으면 그 또한 한 번씩 들어가서 눈 맛을 보아야 그곳을 넘어갈 수 있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하나씩 클리어하는 듯이...


눈더미 하나를 밟고 나오면 나름의 레벨업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신발 하나

두 번째는 양쪽 발

세 번째는 발목

네 번째는 종아리


다리도 짧다 보니 조금 모아 놓은 눈더미라도 이내 무릎까지 들어간다.

결국 어른속도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30분에 걸쳐 모든 장애물을 클리어하며 오늘도 무사히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분명 새 옷을 입고 출발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미 며칠은 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아드님은 미끄러운 골목길 안에서 세 번이나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그래도 좋다는 듯 연신 질러대는 두 아이의 돌고래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말이다.


어른이 된 나에게는 세상이 전부 전쟁터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눈 덮인 세상이 전부 놀이터였다.

비싸고 좋아 보이는 장난감보다 1원 하나 지불하지 않은 눈밭에서 놀았던 30분이 훨씬 더 웃음소리가 컸다. 늘 아이들에게 못 해 준 것만 가지고 미안해하고 끙끙거렸는데 30분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 존재들에게 항상 미안할 수밖에 없는 엄마여서 그 또한 참 미안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고 싶다는 내 안의 작은 소리는 티 안 나게 커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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