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이어트와 B형 남자 2

사랑의 순환

by 복덩이

B형 남자와 왜 결혼했냐고 묻는다면, 참 식상한 질문이다. 그놈의 꽃 때문이다. 그는 꽃처럼 순수했다. 대학교 화장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께 말없이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드릴 줄 알았고, MT를 가서도 앞장서서 상추를 씻고, 아르바이트하며 용돈을 충당하고, 그 마저도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나에게 꽃을 선물했다. 외모는 산도둑처럼 생겼으나, 꽃 같은 마음이 참 곱고 순수했고, 듬직했다.

그럼 그는 나와 왜 결혼했을까? 그는 여전히 '예뻐서 결혼했다.'라고 한다. 솔직히 난 예쁜 편도 아니고 그의 이상형인 김사랑, 한고은 이런 분들과도 거리가 멀다. 키는 157cm고 이목구비는 동글동글한 편이고 임신 때마다 살이 20kg 이상씩 쪘다. 그럼 언제가 제일 예뻤냐고 물어보면 결혼식 때라고 한다.


결혼식 날 참 좋았다. 여전히 생각만 해도 좋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 주러 왔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그날만은 내가 멜로영화 속 등장하는 누군가의 첫사랑이 된 기분이었다. 봄날의 프리지어처럼 웃고 있는 나와 다르게 그는 차렷자세로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아마 귀가 빨개졌던 것 같다.


아이를 임신할 때마다 살이 많이 쪘고, 산후우울증도 심했고 무엇보다 몸이 아팠다. 운동을 한 적도 없는 데다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 골반불균형이 심했다. 그래서 나의 무릎과 허리는 살찐 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다이어트는 턱걸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프기 싫어 시작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위해, 본인의 여유를 양보하여 내가 건강해질 수 있게 해 주었다. 낮에는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밤에는 계단을 탔다.


처음 계단을 타던 8월에는 땀복을 입고, 10층마다 쉬면서 그렇게 100층을 매일 탔다. 그마저도 둘째 녀석이 깨면 달려가서 재우다가 나와서 몰래 운동을 했다. 그렇게 나의 수면시간은 4-5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아픈 게 싫고 무기력한 게 싫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렇게 꼭대기 층에 올라가 도시의 별들을 보는 게 좋았다. 결국 모든 순간은 다 지나가며, 낮은 자리에서도 빛나는 별이 되어 미소 지으며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구석진 계단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는 했다.

내가 밤에 나가 있을 동안 그는 쪽잠을 자며, 엄마 없다고 자꾸 깨는 아이들을 재웠다. 내가 돌아올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티브이 보는 척을 했지만, 말없는 기다림으로 나와 우리가족을 지켰다.


엄마를 입원시키고 자를 수 없는 울음을 길게 길게 늘어놓고 있던 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따로 또 같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 각자 마음에 담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르지 않는 슬픔을 담은 채 그렇게 하루하루를 떠나보내고 있는 내게,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오래된 구두에 만 원짜리 티셔츠만 입는 그는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상장처럼 주어지는 연차 수당 400만 원을 내밀었다. 장인 장모 앞으로 앞으로 들어갈 병원비가 많을지도 모르니 받아두라고 한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출장 간 사이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렸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낡은 서랍장에 1,000원, 5,000원씩 몰래 반지 사줄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처럼.


대물림의 방식은 여러 가지다. 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찾거나, 전혀 다른 사람을 찾거나.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하지만 나에게는 따뜻한 남자. 책임감 있고 생활력 있는 사람. 하지만 B형 남자는 고슴도치였다. 서로를 안고 싶었지만 안는 법을 몰라, 멀리서 사랑하는 이가 울지 않기를 바라며 오히려 가시를 곤두세우며 지켜볼 뿐이었다. 여전히 눈을 흘기고, 나를 이해하지 못해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는 베짱이처럼 글을 쓰고, 독서모임을 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꽃을 들여다보는 혼자 소녀인 채로 남아 자라지 못한 나를 그대로 둔다. 그는 사실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해하는지 말이다.

고슴도치 B형 남자는 그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소녀의 마음속에 간직한 꽃을 지켜주고 있다. 긴 세월 동안, 그는 변했다. 가족이 생겼고, 책임감이 뚜렷한 그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변했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하면 안 된다 생각하게 되었고,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여유를 양보하여 가족들에게 안정을 주었다. 그렇게 그는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다. 꽃을 선물하던 소년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아저씨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때로는 원망스럽고 힘에 겨워, 기대고 싶어 가시를 곤두세우지만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매달림이 힘겹고 폼나지 않아도 결코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내가 입덧이 심해, 냄새만 맡아도 힘들어하니, 하루 종일 굶고 와서 주차장에서 게눈 감추듯 빵을 먹고 빵가루를 묻힌 채로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내가 산후우울증으로 매일 울던 시절, 그는 퇴근 후 현관문 앞에서 매번 심호흡을 하고 웃는 모습을 연습한 후에 어지러운 집을 치우고 아가를 목마 태워 주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의 아버지를 닮은 아저씨가 되어 갔다. 어쩌면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설공주는 왕자님과 그렇게 행복하게 여생을 마무리했을까? 동화를 믿지 않게 된 우리는 그 뒷모습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너무 행복하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힘들 때마다 서로를 아껴준다.' 이런 말은 자신 있게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가끔, 그가 지켜주고 싶어 했던 소녀의 봄날의 프리지어 같은 웃음에 여전히 소년의 귀 언저리가 빨개지는 것을 보면 사랑은 계절의 순환처럼 매번 추운 겨울을 뚫고 기어코 움을 틔우고 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된다. 봄이었다가 여름이었다가 가을이고 겨울이고. 우리는 변했다. 사랑의 모습도 변했다. 변덕스럽고 규정짓기 힘들며 오묘하면서 익어가는 사랑의 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마음속에 시들지 않은 소담한 꽃을 간직한 소녀가 여전히 퇴근 후 주차장에서 한숨을 쉬고 웃음을 연습하고 올지도 모를 소년을 안아줄 차례인지도 모르겠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