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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걸이와 내가 딛고 있는 지구

by 복덩이

정호승 시인을 좋아한다. 외로움, 아픔을 담았지만 그 색깔이 따뜻해서 좋다. 그 중에 '어느 장님 부부의 노래'라는 시의 구절이 종종 생각난다.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내 마음 속 나는 항상 시리고, 시렸다. 남들은 덥다고 할 때 수족냉증이 마음 속에도 있어서 손목, 발가락은 왜이리 콕콕 쑤시고 으슬으슬하던지. 그래서 내 스스로에게 내가 그 따스함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마음 속 화장실 문을 열고 정성스레 쓸고 닦으며 그 공간마저도 사랑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게 나.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생각한 결핍들에 하나 하나 사랑의 이름을 붙여보며 거기에 물을 주고, 햇볕을 비추며 그럼에도 봄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숨기고 아프다 생각했던 것들을 나 혼자 '도장깨기'해보니, '슬픔도 동정어린 시선도, 원망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감히 이런 말은 하지 못하겠다. 나의 그릇은 지극히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게 뭐 어떤데.'라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고달픈 것도 삶이고,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운 것도 삶이며, 기쁘고 감사한 것도 삶이다. 다만, 이제는 과거의 결핍에 묶인 나를 놓아주어도 되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세상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태어난 이유? 없는 거였다. 나는 애초에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였다. 생명이 부여됨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내가 향하는 생명의 방향은 선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에 머물러 있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 넣어 봄의 왈츠를 추며 민들레 꽃 씨앗이 되어 그렇게 가볍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 그 씨앗은 다시 기나긴 겨울을 뚫는 봄의 상징이 되어 지지않는 꽃으로 내 마음의 봄을 기어코 불러 올 것이다.


나의 뒷모습을 겨울으로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결핍을 아름답게 빚어내고 꽃으로 피워내며 순진하지만 단호한 발걸음을 이어갈 것이다. 그런 계절이 순환 속에서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증오하며, 사랑하고픈 나라는 지구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한다.


아프니까 꼭 안아달라는 말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내뱉고, 타인에게 화살을 돌린다.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 J언니는 말했다. "그건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들어."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리고 웅크리고 있는 나를 진정 안아 줄 수 있을까? 그 모든 것들을 미워하지도 탓하지도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결핍의 흔적은 내가 가진 것인지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바람구멍이 점점 커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것들을 진작 알았더라면 아니 앞으로 정확히는 모를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은유와 함축의 세계로 여전히 해석할 뿐이다.


밀려드는 시간 속에서 종종 나도 사랑과 배려의 단어는 뒷전으로 두어 버린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 돈이 되는 것이 안니까. 지금 생활에 현실적인 도움은 아니니까.


내가 그때 바라보았던 무지개는 진짜 였을까?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고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가슴에 남아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남기겠다는데 그것이 환상이었을지라도 어쩌면 그 끈 하나로 그걸 믿고 살아가라고 누가 나에게 남겨준 선물일지도 모르잖아.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수학적 기호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글로 저마다의 해석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영원히 지지 않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색색깔 무지개와 별이 빛나는 그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나는 자라지는 못했지만 꿈하나 놓치기 싫었다. 누군가는 나를 한심하고 우스꽝스럽게 바라보았을 수도 있지만, 이상 속에 산다 비웃을 수도 있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내가 무지개가 비추는 세상 속에서 삶을 아름다운 색으로 채워나가겠다는데 응원은 아닐지라도 나의 것이 하찮게 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지. 진짜 그렇게 조금씩 변할지도 모르잖아. 윗집에 소똥이 아랫집 개똥이 우리집 똥돼지들이 더 따뜻하게 살게 될지도 모르잖아.


난 내가 용을 쓰며 혼자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나를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고 매일 무언가를 쌓아가는 나의 노력이 나를 살아남게 했다고 규정지었다. 삶은 투쟁이었고 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친해지기 힘들었던 이유는 그들을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지구를 거스르고 싶었던 나는, 나라를 지구를 들어올리기 위해 용을 썼던 나는 한번도 내가 딛고 있던,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싶어했던 나의 위태로운 발을 기어코 끌어당기고 있던 지구를 단 한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서, 내가 걱정되서 매일 발이 밟혀도 티도 내지 않던 그가 참 밉고 싫다. 난 그런 것들이 정말 싫다. 바보 같은 사랑이 싫고 티내지 않는 사랑이 싫고, 알아주지 않는 사랑이 싫다. 그 모든 것들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 아픈게 싫다. 그리고 그 마음 아픈 사랑들로 세상 행복하게 살아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내가 때때로 밉다. 처음부터 나의 한계는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 내가 서 있는 그자리가 실은 누군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내가 거스르고 싶어 했던 그 중력조차도 실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었고, 나는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르고 내가 이룬 것이 누군가의 어깨 언저리를 딛고 올라서 그 자리인지도 모른채 세상을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원망했다.


말없는 기다림, 고슴도치 같은 사랑, 눈빛 미소 말투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지녔지만 결국 같은 내용을 노래한다. 그 언어가 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도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단지 그것을 결핍이라고 칭하며 한없이 아파하기만 했던 내가 불쌍하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그 사랑을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세상을 향해 여전히 원망을 날리고 싶다. 우리는 정적이며 고정된 세계에 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의미 하나로 가슴에 따뜻한 희망을 가지고 한 발짝 아니 딱 반 발자국씩 순진하지만 단호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핍은 처음부터,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으며 내일을 비추는 해를 따라 이어지는 나의 길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슬프고 고독하다는 생각만을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의심했으며, 나아지지 않는다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불행하다 생각했던 그 매순간도 누군가의 사랑으로 지탱하고있었음을. 그 사랑 앞에 나는 결국 굴복할 수 없는 존재임을. 여기서 가장 뻔하고 식상하며 상투적인 말을 하고자 한다.


엄마. 아빠 나 태어나서 행복해.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 나 행복할거야.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졌어. 엄마 아빠도 행복해. 결핍, 슬픔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겠지만, 나 도망가기 싫어. 마주보고 쓰다듬어 줄게.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게. 엄마아빠가 가르쳐준대로. 나한테 남은 것은 그 하나 뿐이야. 그게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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