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의점 첫 출근 일지

긴장으로 얼굴 전체가 돌처럼 굳었다

by 그냥

유튜버는 위대하다! 일주일 동안 하루 서너 번 동작을 반복했더니 늘 달고 살았던 오른쪽 고관절 통증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순간적인 효과일지 일하고 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지는 몰라도 기분만큼은 훨씬 나아졌다. 퉁퉁 부었던 발을 위해 쿠션 좋은 운동화도 거금을 들여 새로 샀다. 원판이 부실하니 장비빨이라도 받아야지.


드디어 혼자 일하는 첫날! 오전 내내 마음이 붕붕 날아다녔다. 배곯으며 일하기 싫어 오이 김밥을 싸고 핸드폰 충전기도 챙겼다. 인수인계 때 찍은 영상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거의 외울 지경이다. 그래도 모르는 게 있으면 점장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되겠지. 근무 중 틈틈이 스트레칭도 하고 의자에도 앉고... 이 정도면 정말 준비된 알바생 아닌가 싶지만, 실은 나를 이렇게 만든 건 간절함이다. 나는 이혼 후에도 어떻게든 무난하게 삶을 일궈내고 싶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는 마음이 사뭇 비장하다. 불안, 설렘, 자신감 조금. 복잡한 감정을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몰아넣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나와 교대할 근무자에게 인사를 하고, 매장 안쪽에 걸려 있는 편의점 조끼를 입었다. 장갑을 끼고 계산대에 섰다. 가장 먼저 돈통의 현금이 포스기 숫자와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폐와 동전 세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몇 번 헤매다 겨우 시제를 맞췄다. 교대자는 바로 퇴근하지 않고, 워크인이라 부르는 음료와 주류 냉장고를 채우느라 30분 동안 더 머물렀다.


“수고하세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떠났다. 이제 정말 혼자 남았다.


이후 시간은 대체 내가 뭘 했고 뭘 못했는지 또렷하게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혼돈 그 자체였다. 포스기 다루는 일이 너무 어렵고 복잡했다. 점장의 시범은 수십 가지 상황 중 한두 가지에 불과할 뿐, 얼마나 돌발 상황이 많았는지 긴장으로 얼굴 전체가 돌처럼 굳어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가장 적응이 안 됐던 건, 할인도 적립도 결제도 모두 바코드 리더기로 찍기만 하면 되는 프로세스였다.


예를 들어 새우깡 한 봉지를 계산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새우깡 봉지의 바코드를 스캐너로 찍는다

2. 포스기의 현금/카드 버튼을 누르고 현금을 받거나 카드를 단말기에 꽂아 결제를 마친다.


그런데 손님이 1번과 2번 사이에 통신사 할인을 하겠다며 내게 바코드를 보여 준다. 이럴 때 나는 화면에서 ‘할인’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새우깡 바코드를 찍은 그 상태에서 할인카드 바코드를 찍으면 자동으로 ‘알아서’ 할인이 됐다. 곧이어 카드나 카카오페이 바코드를 찍으면 계산이 끝나버린다.


바코드를 찍는 행위 만으로 계산을 빠르게 마칠 수 있으니 결국엔 손님도, 직원도 모두 편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나는 편하지 않았다. “통신사 할인하시겠습니까?” “카드 결제를 하시겠습니까?” 이런 문구를 눈으로 읽고 “예” 혹은 “아니오”를 누를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적어도 손님이 보여 준 바코드가 무엇인지, 내가 뭘 찍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두 번째로 내 혼을 쏙 빼놓은 건 담배였다. 내가 아는 건 솔, 장미, 88... 오래 전 아빠가 좋아하던 담배들뿐인데. 언제 이렇게 담배 종류가 많아졌을까. 100종류가 훌쩍 넘는 담배들이 계산대 뒷벽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옆면, 계산대 아래쪽까지 점령했다. 점장은 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손님들이 말하는 담배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담배 손님들은 대부분 자신이 피우는 담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카운터로 걸어올 때부터 눈과 손이 자신이 원하는 담배로 향해 있었다. 어리바리한 내 앞에서 손가락을 척척 뻗으며 “저기 빨간색이요” “왼쪽에서 두 번째 노란색이요.” “그 옆에 옆에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긴. 그들도 흡연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초보 알바를 만났을까. 그들 나름의 대처법이 내겐 너그럽고 고마운 선행으로 남았다.


도시락으로 싸 간 오이 김밥은 꺼내지도 못했다. 일 배우랴 손님 응대하랴 바쁘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포장된 물건들 사이에서 은박지로 대충 싼 김밥을 먹으려니 왠지 쑥스러웠다.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과 참치김밥을 하나씩 먹고, 내가 좋아하는 아몬드도 2+1 행사를 하기에 구입해 한 봉 먹었다. 퇴근 때까지 속이 든든했다.


다시 또 퇴근길. 걱정했던 고관절에서는 미미한 통증만 느껴지고, 이번엔 발바닥이 더 아팠다. 종종걸음을 많이 친 탓일 거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 적어도 지난번처럼 로봇이나 펭귄 같지는 않잖아. 버스 의자의 등받이가 간절한 밤이었다.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03화나이는 못 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