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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18. 2024

기성의 마지막

트럭은 가녀린 햇가지가 솟아 나와, 자줏빛을 이루고 있는 굵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 사이에 주차되어 있었다. 시동이 꺼지지 않은 트럭 주위로 엔진소리가 퍼져 나가고 있었지만, 뒤편의 짐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건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망할 것. 그 어린놈이 또 내 집 앞마당에 피를 뿌려 놨겠구먼. 어휴, 뻔하지, 뻔해. 뻔한 일이야. 안 봐도 선하군. 젊은 놈이 뭐가 그리 속이 화로 가득한지.”


어두운색의 지게차. 노인의 목소리는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위장을 꾀한 것처럼 나무의 색감과 상당히 흡사한, 갈색 계열에 가까운 지게차였다. 지게차는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트럭에 있던 물건들이 지게차에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죽상을 띠고 있었다. 오래된 연식과는 대비되는 얼굴만큼이나 뽀얀 그의 손. 그와 같은 손으로 핸들을 붙든 노인은 어디론가 차를 몰고 가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었다.


“매번 교묘히 이 시간을 빠져나간단 말이야, 그놈 그거는.”


노인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노인이 떠올릴 사람은 은평을 제외하고서 단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색과 동시에 무표정으로 있던 노인의 입꼬리가 일순간 꿈틀거렸다.


“진짜 어이가 없는 건 같이 딸려 온 그놈이야. 제깟 놈이 뭔데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 품위 걱정을 해 주냔 말이지. 곧 나가 뒈질 새끼가 말이야.”


그렇게 한 문장을 끝낸 노인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그와 같은 행위들을 지게차의 시동을 꺼뜨릴 때까지 연이어 반복했다. 그리고 지게차는 트럭이 주차되어 있던 곳, 그곳에서 대략 18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포크 위, 탑처럼 쌓여 하나의 뭉텅이가 되어 있는 물건들은 보이는 것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순서가 정해져 있는 듯했다. 액자, 끈, 톱, 이음새처럼 사이의 공간을 절묘히 파고들어 외곽을 조이고 있는 나무 장작. 지게차의 포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노인도 그 순간만큼은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 땅파기 작업을 마친 경작지에 씨앗을 흩뿌리듯 포크의 바닥 면과 땅이 조용히 맞닿았다. 노인은 액자가 살짝 들린 틈을 타, 차를 후진시켰다.


“됐군.”


지게차에서 내린 노인이 말했다.


“아이고, 추워. 아직도 실랑이를 못 끝냈나. 무슨 쿠데타라도 일어난 게야? 아아, 아니지. 차라리 그렇게 돼서 그놈이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리고 말을 마친 노인은 오른쪽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어 손바닥 위로 탁탁 내리쳤다. 두 개비가 튀어나왔다. 노인은 하나를 입에 물고, 남은 하나를 바닥에 내쳤다. 부싯돌 소리가 일었다.


“불쌍한 곳이야.”


담배의 첫 연기가 피어오를 때 노인이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자연은 짐승 따위를 그슬리기에는 더없이 아까운 장소였다. 액자 너머에는 절벽이 있었다. 보르네오의 키나발루 단면 하나를 떼어 내 가져다 놓은 것처럼 풍채와 멋이 대단한 절벽이었다. 절벽은 상당한 높이만큼 너비 역시도 지대했다. 튀어나온 풀뿌리나, 가지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빠져 있는 단면도 장소의 격을 더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아래의 모습은 두 다리가 풀려도 충분할 만큼 까마득했다.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었다면 검게 찰랑대는 물결이 보였을 것이다. 실상은 말라비틀어진 바위들뿐이었지만. 두 다리 꼼짝하지 않고 한 개비를 모두 태운 노인은 말없이 혀로 이빨을 쓸었다. 그리고 노인의 등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났다. 노인 주변으로 떨어져 나갔던 꺼풀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은평이 차량 뒷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짝눈 사내가 조용히 발을 내린 뒤, 문을 닫았다. 여전히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사내의 눈에 맺혀 있었다.


“아유- 아닙니다, 보스. 이럴 때 밥값을 하는 거지요.”


노인이 고운 손을 배꼽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시작할까요?”


은평은 뒤에 있는 짝눈 사내를 향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돌아, 차의 반대편으로 갔다. 문 쪽이 시끄러웠다. 사내가 문을 열자, 손과 입이 묶인 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묶임을 당하는 순간에 깨나 반항을 한 듯, 머리 주변이며, 손이며, 생채기가 많았다. 차에서 끌려 나온 기성을 짝눈 사내는 힘으로써 이끌었다.


“그렇지, 그렇지. 어때요. 막상 죽음이 앞에 보이니 그리 달가운 기분은 아니죠?”


은평이 말했다. 그리고 은평은 또 한 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사내는 한쪽 팔로 기성의 팔을 붙들고서 제법 거칠게 기성의 입에 물린 손수건을 뽑아냈다. 그때 노인이 슬금슬금 은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해 봐요, 기성 씨. 기분이 어떤지.”


은평이 건네는 말에 기성이 입안에 고인 텁텁함을 침에 모아 뱉어낸 다음, 말하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낑낑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아주 좋아. 죽음?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어. 특별할 것도 없지. 그리고 이젠 숫자를 안 세도 되니 오히려 좋아.”


“숫자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까는 왜 그렇게 발버둥 쳤습니까.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그걸 그렇게 보았다니 애석한 당신 머리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는걸. 거기 당신도 마찬가지인가?”


짝눈 사내를 향해 말하는 기성을 보며 은평은 움찔했다.


“글쎄.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사내가 대답했다. 나방의 날갯짓이 멎은 그의 목에서 울적한 소리가 나왔다. 노인이 사내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다음으로 기성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당신은 잘 알겠군. 방금 친애하는 동료를 잃은 참이니까.”


그를 들은 짝눈 사내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오른 주먹이 기성의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기성은 그대로 코를 땅에 찧었다. 짝눈 사내는 한 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기성을 들어 올렸다. 그때, 은평이 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흐흐흐, 정곡이었군.”


기성이 짝눈 사내의 꽉 쥔 주먹을 보며 말했다. 손으로 검붉은 피멍울이 선명했다. 그리고 은평이 기성을 붙들고 있는 사내의 곁으로 황급히 뛰어왔다. 노인은 마실 나온 사람처럼 히죽대며 그를 구경했다.


“제가 발목을 봤을 때부터 참고 있단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요. 회장님께서도 더 이상의 전진은 원하지 않으실 거라 봅니다만.”


짝눈 사내는 큰 눈으로 은평을 바라봤다. 1, 2, 3. 사내는 3초가 지나고 기성을 내려놓았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기성 씨도 입 다물고요.”


기성은 풀린 눈으로 은평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더럽게 많은 얼굴이었다. 은평은 뒤돌아섰고, 사내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기성은 사내의 몸통에 의존해 왼발로 바닥을 쿵쿵 찧었다. 기성은 풀린 눈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성은 이내 눈을 감았다. 기성은 암시를 걸었다. 시작은 철학을 표방한 감성이었다.


‘눈, 나는 눈을 밟고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길. 나는 이 지금 홀로 걸어가고 있으며,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이다. 누군가 보인다. 여자다. 눈, 여자의 눈망울이 나의 것 같다. 도와주고 싶다. 아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넬 수 있는 존재였던가? 아, 그래. 나는 지금 저 여자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기성은 눈을 떴다. 기성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은평이 노인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성은 그때 알아차렸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산바람이 뺨을 연신 쓸고 지나갔음에도 기성의 눈물 자국은 굳지 않았다. 기성의 눈물은 자리가 굳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채우고 또 채웠다. 기성은 몸을 휘적였다. 짝눈 사내의 몸을 밀치기도 하고, 묶인 팔을 양쪽으로 비틀어 손을 뿌리치려고도 했다.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노인이었다.


“저기.”


은평의 고개가 움직였다. 큰 웃음과 함께였다.


“아니, 기성 씨.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하하하하! 우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아니, 왜. 어디서 그런 포인트로 뒤바뀐 거죠? 제가 별달리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이제야 좀 현실을 느끼기 시작한 건가요?”


은평의 조롱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기성의 눈앞에서 은평은 자유의 깃발을 뒤흔들었다. 다가와 뺏어가 보란 듯이. 할 테면 해 보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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