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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19. 2024

아기 새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이 뒤에서 자신을 밀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이미 많이 참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상표 달린 옷 정도는 벗고 동행해 줄 수 있지 않나?”


그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사람이 허릴 굽혀 그에게 속삭였다.


“회사 광고를 해야 해서요.”


휠체어에 앉은 사람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하늘을 쳐다봤다. 오래 살게 된 인생을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오구, 예쁘다. 어이구, 그래, 내 새끼.”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이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유모차 안에 있는 은 무슨 말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내걸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나가던 가현이 그것을 대신해 대답했다.


“내가 왜 네 새끼야.”


양주가 담긴 플라스크처럼 쥐여 있는 플라스틱 소주 팩. 투명한 바닥 위로 미량의 술이 찰랑거렸다. 가현은 취해 있었다. 시간은 늦저녁에 가까웠다. 아직은 하늘에 겨울 태양의 온기가 조금은 남아 있었다. 거리는 퇴근길을 밟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 번쯤은 취해 본 경험이 있을 그들조차도 가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부분이 눈으로 가현을 쫓았다. 흥미롭다는 눈길이었다. 엉큼한 누군가는 일부러 가현의 곁으로 몸을 갖다 대기도 했다. 가현은 상관치 않았다. 가현은 걷고, 또 걸었다. 바뀐 신호에 건너지 않아 보기도 하고, 빈 택시를 불러세워 깔깔대고 욕설을 퍼부어 보이기도 했다. 경찰은 오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택시 기사는 손을 재빨리 움직일 뿐이었다.


“이거는 그쪽이 합의금으로 준 겁니다! 나는 몰라요!”


가현의 지갑이 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가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운뎃손가락을 기사를 향해 빳빳이 세워 올렸다. 택시 기사는 가현의 지갑 통째로 들고 떠났다. 도보와 도로의 사이였기에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멍하니 있던 가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가현의 주위로 적막이 찾아왔다. 가현은 팩에 남은 마지막 술을 마저 털어 넘겼다. 가현은 빈 통을 들고서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던지듯 몸을 걸터앉았다.


“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네.”


가현은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정말 내가 바라던 대로 됐어. 전부 다.”


“연희도 잃었지, 집도 잃었지, 짝도 잃었지, 이제는 가족도 잃게 생겼네? 아, 나는 완전히 실패해 버렸구나. 이 개 같은 것들을 피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모든 게 반대편으로 도망치고 말았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내가 어떤 얼굴을 띠고 있어야 우리 아빠가 날 살려 놓을까.”


말을 끝낸 가현은 고개를 숙였다. 벤치에 앉아 있는 가현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더없이 외로워 보였고, 초라해 보였다. 또한, 그녀의 마지막 말은 스스로 내뱉고도 흠칫 놀란 말이었다. 극심한 취기에 젖어 있었지만, 가현은 자신이 뱉은 마지막 말이 머리에 각인되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퇴근길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 본인의 집으로 들어가고, 가로등 불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늦저녁과 밤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차가웠고, 똑같이 너그러움이 없었다. 가현은 옆으로 몸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가현은 눈을 감았다. 밤이 더욱더 깊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알전구들이 환영식을 치르듯 가현이 누운 벤치 주변을 깜빡이며 쏘다녔다. 가현은 몸을 맡겼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차가움이 이끄는 대로.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럭저럭한 도심의 복판, 무슨 청, 무슨 서, 무슨 소…, 가현의 전화가 울렸다. 진동에 가현은 눈을 떴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가현이 전화를 받지 않자, 또다시 전화가 울려 왔다. 화면 상단 시계가 3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저장된 이름이 있었다. 가현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파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가현의 다급한 목소리와 전화 너머 노파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왜 전화 안 받았어? 지금 어디야? 기성 씨는? 왜…”


“그 아일 찾았다.”


노파의 말 한마디에 가현은 얼어붙었는지조차 몰랐던 몸이 움직이려 한다는 걸 느꼈다.


“아아, 그래, 찾았구나. 그 사람을 찾느라 내 전화를 못 받았던 거구나. 지금 어디에 있는데? 그곳으로 데려가는 중이야?”


노파는 말을 돌렸다.


“혹시 버섯의 존재를 알고 있니?”


가현은 모른다는 말을 쉽사리 내뱉지 못했다. 가현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가현은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다. 알고 있다고,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은, 기성은 무사한 거냐고.


“그 아이를 그곳 근방에서 보았다는구나.”


노파의 목소리는 덤덤하려 노력하는 기색이 짙었다. 가현은 고개를 숙이고 신음했다. 가현은 자꾸만 찾았다는 표현을 쓰는 노파에 화가 났다. 가현은 속이 울렁거렸다. 가현은 벤치 옆을 더듬었다. 무엇이어도, 뭐가 됐든 좋으니, 제발 자신의 손 한 번만 잡아 주기를 바라면서.


“나 기억났어. 버섯.”


“길옆에 숨어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명칭이야.”


그리고 가현은 노파를 향해 빌었다.


“…모든 게 내 책임인 걸 알고 있으니까, 어서 말해. 말해도 돼.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야.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줘.”


“네 잘못이 아니야.”


“말해.”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말해.”


“가현아.”


가현은 목구멍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걸린 듯이 숨 쉬는 게 고통스러웠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한 번씩의 날숨. 가현은 입을 벌린 채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검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며 그와 같은 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가현아, 듣고 있니?”


가현은 듣고 있지 않았다. 전화를 든 손은 이미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주르르 흘러내릴 듯이 위태로이 걸쳐져 있는 엉덩이와 땅으로 꼬라박힐 듯이 매달려 있는 상체. 가현은 이미 원래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작금과 같은 상황의 뒷부분은 가현이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가현은 새로이 태어나야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얇은 목은 떼어 내고, 하늘을 날 수 없는 가냘픈 날개 따위는 찢어발기면서. 가현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현은 오른 어깨를 시작으로 서서히 위를 향하여 손을 뻗어 나갔다. 손이 목에 다다랐다. 가현은 양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가현의 감긴 눈에 떨림은 없었다.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현은 있는 힘껏 아귀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아기 새의 모가지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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