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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21. 2024

밀코바라는 남자

간판 없는 양복점을 지키고 있는 거구의 남자. 몸에 커다란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 같은 풍채였지만, 그의 몸은 깨끗했다. 비어 있는 쇳덩어리 간판의 윤곽으로 각색의 전조등 불빛이 일렁거렸다. 남의 색을 훔치고 있는 가게였다. 눈에 띄고 싶은 욕망은 그득하지만, 정작 내세울 만한 자기의 것은 없는 비참한 따라쟁이. 공덕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을 들은 밀코바의 모습이 저와 같았다.


“미안합니다. 말을 놓은 건 실수였습니다.”


공덕이 말했다. 밀코바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가혹히 표현하자면, 혓바닥이 잘린 사람 같았다. 대꾸는 물론이거니와 밀코바는 반항 한 번 꺼내 놓지 않았다. 그동안에 보인 모든 연기들. 우위 선점에 성공한 패권자 같다거나, 골탕 먹이기에 능수능란한 제비, 혹은 사기꾼. 필요한 순간마다 공덕의 앞에 분신 아닌 분신을 내세우던 그는, 공덕의 말 한마디에 병신이 되어 버렸다. 공덕이 다시금 밀코바를 향해 말을 건넸다.


“지금의 모습은 또 너무도 과묵하시군요. 그게 밀코바 씨의 본모습이라면 정말 놀랍습니다. 연기로써 타고난 성격까지 제어하실 수 있다는 거니까요.”


밀코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덕은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벙어리가 되기로 결심한 연기자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일. 공덕은 즐거웠다. 밀코바는 여전히 일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시선 자락이 어중간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식어 가는 찻잔을 향해 있어 그런 듯했다. 그것뿐이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부엌을 울렸다.


“아침에 부인께 보인 모습은 무엇을 연기한 것이었습니까? 아, 그게 평소에 밀코바 씨가 남편으로서 풍기는 모습이군요?”


공덕이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줄어들었다. 시간은 더 이상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멈췄다. 그리고 벽시계는 소리의 앞과 뒤를 뒤바꾸어 퍼뜨리기 시작했다. ‘똑딱’이었던 것이 ‘딱똑’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정확히 밀코바의 귓가를 직격했다. 돌처럼 변함없던 밀코바의 얼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밀코바는 공덕을 노려봤다.


“부인께서는 밀코바 씨와 같은 연기자가 아니니까요. 설마하니, 2층으로 올라가는 것까지 합을 맞춰 놓은 건 아니실 테고…”


“그만하시죠.”


밀코바가 말했다. 소심한 사내아이처럼이나 터무니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말투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밀코바에게 또 한 번 직격했다. 밀코바는 다시 쪼그라졌다. 밀코바의 얼굴이 시뻘겠다.


“그만 멈춰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를 들은 공덕의 치아가 모조리 드러났다.


“그래요? 제가 그만두길 원하십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밀코바 씨. 저는 당신의 모두를 끝까지 다 봐줬던 것 같은데요. 변덕이 심한 갱년기 여인도, 창문을 들먹거리는 심리치료사도, 남 회장님의 대변인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양 손바닥을 부닥쳐가면서 말이죠. 어때요, 제 말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해드려야 놀리는 것을 그만둬 주실까요.”


밀코바가 물었다.


“그렇죠, 그렇죠.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공덕은 몸통을 고개 숙인 밀코바 쪽으로 숙이며 말했다.


“우선은 2층으로 올라가, 부인 분부터 달래 드리세요. 회장님이 오실 때까지는 해결해 놓으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연기하려 들다간 죽을 줄 알아.”


밀코바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2층 계단을 밟았다. 부엌에 남겨진 공덕은 밀코바의 뒤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가 사라지자, 몸을 늘어뜨리고서 숨을 내쉬었다.


“이거 완전 개망신이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등으로 식탁을 치던 공덕은 그 위에 놓여 있는 신문 한 부를 발견했다. 영어신문이었다. 신문을 위아래로 훑은 공덕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신문 한쪽으로 자리한 사진. 그리고 그 안의 남자. 강을 배경으로 경사진 하부에 세워져 있는 네모난 무대. 군데군데 녹슨 자국.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계단을 의자 삼아 자리를 채우고 있는 관중들.


‘관객을 갈망하는 사람들.’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생계가 어려운 무명 배우들이 운집해 펼친 버스킹을 다룬 기사였다. 밀코바가 무대 위에 서 있다.그리고 사진 하단에는 밀코바의 단독 인터뷰 몇 줄이 들어가 있었다.


‘한번은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갔어요. 링거를 맞아야 해서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았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간호사가 바늘을 빼러 와 주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팔에 박힌 주삿바늘을 제 손으로 뽑아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계산서를 내밀 때만큼은 저에 대한 존재를 아는 체해 주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유명해져야겠다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기자들의 글 역시 밀코바에게 집중돼 있었다. 문체들이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공감한다는 둥, 응원한다는 둥, 심지어는 기자 본인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설 문장까지. 연기자, 그 하나를 떠올림으로써 공덕은 간파한 것이다. 밀코바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2층에서 부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좀 더 컸다.


“어제 저런 소리가 들렸어야 했는데.”


그를 들은 공덕이 말했다. 그리고 공덕은 보던 신문을 대충 접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앉은 자리에서 2시간이 지났다. 전보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공덕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석 잔의 차를 모두 비웠다. 앉은자리에서 자세만 몇 번 바꾸었을 뿐, 공덕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상황 속에 남의 집 곳곳을 이리저리 기웃댈 수도 있었지만, 공덕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절반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부부의 발소리가 들리기 직전이었다. 공덕의 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공덕은 황급히 전화를 빼내 들었다.


“예, 회장님.”


“실장님, 접니다.”


생쥐였다.


“뭐야? 네가 왜 이 전화를 들고 있어?”


“아, 그게, 오며 가며 하다 보니 제 전화의 배터리가 나가 버려서요.”


“회장님은?”


“헬기에 오르시자마자 곯아떨어지셨습니다. 실장님에게 연락 넣으라는 말만 남기고 가셨는데, 달리 도리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회장님 전화에 잠금이 걸려 있지 않더군요. 크크.”


생쥐의 말에 공덕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뱉어냈다.


“발신 기록은 지우도록 해. 걸렸다간 아작이 날 테니까.”


“예예, 물론입죠.”


“도착은?”


“10분 후면 도착할 거 같습니다.”


공덕은 시계를 확인했다. 생쥐의 말대로라면 정오 얼추 비슷한 시간이었다. 2층에서 내려오는 부부의 발소리가 들렸다. 방문 닫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헬기 대. 내가 지금 그리로 나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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