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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16. 2024

거대한 불쏘시개

감성과 함께 불편함을 취하느냐. 감성은 포기하고, 외면만을 내세우느냐. 유서 두 장 모두를 읽은 시안은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런 시안의 마음은 겉으로 티가 났다. 사진을 밀어냈던 것처럼 시안은 유서를 밀어냈다. 시안은 펼친 종이를 다시 접어 살포시 함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시안은 멍한 눈으로 앞의 다른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은 생각했다.


‘…고아셨구나. 연 집사님도.’


‘그래서 나를 그리 대해 주셨던 걸까. 그래서였던 걸까.’


시안은 고개를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여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시안은 얼룩진 말들을 되풀이하며 스스로 지치기를 자처했다. 그냥 그대로 지낼걸. 그냥 시키는 일만 할걸. 그냥 하던 대로만 하고 살걸. 가득한 상념에 오롯이 회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가지게 된 것들에 대한 포만감도 분명 자리해 있었다. 일종의 시소였다. 시안은 끊임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리의 건너는 이미 불타 사라지고, 남아 있는 건 현재의 자신이 앉은 자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죄송해요, 집사님.”


시안은 종이 옆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실수했어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정말 죄송해요, 연 집사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시안이 더 깊이 들어가려는 그때, 복도에서 웬 남자들의 목소리와 하녀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시안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자, 모두 빨리빨리 나갑시다. 저희가 시간을 드리는 거예요.”


목소리는 1층 현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시안은 계단 난간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남자들은 하녀들을 저택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불량스러운 복장이 아니었다. 반반한 생김, 훤칠한 키. 그들은 덩치에 꽉 끼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안이 상황을 보고 있는 그때, 계단으로 하녀 한 사람이 뛰어 올라와 거친 숨소리로 말했다.


“집사님, 웬 사람들이 갑자기…”


하녀는 몹시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포로 뒤덮인 눈을 본 시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녀가 소리쳤다.


“집사님!!”


고성을 들은 시안은 그제야 정신이 붙잡혔다.


“일단 침착하세요. 무슨 일이에요? 저들은 누구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을 하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저택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려 해요.”


“알겠어요. 제가 얘기하러 가볼게요. 우선은 저 사람들 말을 따라 주고,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부터 안심시키고 있어 주세요.”


“네!”


그 사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남자들은 깊숙한 곳까지 퍼져 있었다. 시안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온 시안은 7명의 남자 중 가장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 사내는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튀지 않는 옷차림, 그리고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회장님의 지시로 오신 분들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필요한데요.”


남자에게 말을 건 시안은 침착하려 노력했다. 남자는 표정이 없었다. 남자는 말없이 시안을 내려다봤다. 시안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보세요!!!”


그리고 시안의 고함이 멎을 때쯤, 남자의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피어났다. 구두 위로 검은 옷을 입은 가현이 서 있었다.


“아버지의 지시가 아니라면?”


가현이 말하자, 남자는 옆으로 몸을 비켰다. 가현은 시안의 얼굴 한 뼘 앞까지 다가왔다.


“…아가씨?”


“묻잖아, 아버지의 지시가 아니라면 어쩔 거냐고.”


“아니, 그…, 무슨 상황이길래 이러시는지 설명이라도…”


“너한테 설명하라고? 너한테는 해 줄 말은 없는데. 아, 있다. 너는 저택에서 나가지 못할 거야. 너는 나갈 수 없어.”


시안은 대꾸치 못했다. 가현은 시안의 등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옆의 남자에게 말했다.


“남은 사람들 마저 밖으로 내보내요. 해 질 녘은 시간이 빨라요.”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사내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정장 차림의 남자들 무리에 합류했다. 가현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현은 다시 시안에게로 눈을 맞춰 왔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아가씨.”


“예상했던 것보다 얼굴이 좋지 않네? 자리가 무거웠나 봐? 그게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시안은 머리가 멍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머리가 백지장이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연희의 어디까지 승계받았어? 그 인간이 하고 있던 짓거리 모두를 너에게 말해 주던?”


가현이 남현을 처음으로 남으로 칭했다. 시안은 그때가 되어서야 가현이 모든 것을 알고 왔다는 걸 눈치챘다. 시안은 말을 듣는 내내 답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가씨는 다 알고 계신 거야. 풀어야 해, 오해를.


“아가씨.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이 아니, 해 드려야 하는 말이 있는 거라면 지금 당장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다요.”


“필요 없어. 너는 이곳에 남아 있기만 하면 돼.”


“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회장님께서도 돌아오지 않으셨잖아요. 게다가 아가씨의…”


거기서 가현은 시안의 말을 끊었다.


“말했잖아. 이제 다 필요 없다고. 네가 지금 나한테 하려고 했던 말을 알아맞혀 볼까? 내 어머니 얘기지?”


시안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시안은 손이 떨렸다. 전과는 달라진 가현의 태도. 가현은 너무도 태연했고, 가현은 너무도 차가웠다. 시안은 몸을 뒤돌려 밖으로 끌려 나가는 다른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시안만큼이나 겁에 질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손에 붙들린 그들 중, 반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가현을 본 하녀일수록 더욱 그랬다.


“어머니를 만나 뵈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제가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아가씨의 아버님께 전부 다 인계받았어요. 그러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정말 그 인간이 너한테 모든 걸 이야기해 줬다고 생각하니?”


“아니요! 하지만, 그건 연 집사님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모두를 듣진 못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시안이 말을 끝내자, 가현은 손을 치켜올렸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내리칠 것처럼 가현은 시안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지난번보다 무자비하게 네 얼굴을 휘갈기고 싶지만, 나는 오늘 그러지 않을 거야. 네 얼굴을 보니 알 거 같거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지내고 있었는지 말이야.”


그리고 가현은 시안의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너, 지금 연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지? 아니야? 맞을걸? 다 보여. 그 인간의 사탕발림을 받은 것에 후회하는 얼굴이.”


가현은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가현은 세차게 흔들리는 시안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거기서, 장갑 낀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저택 안을 울렸다.


“전부 내보냈습니다!”


가현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시안에게로 눈을 돌려 말했다.


“시안아, 이제 우리가 시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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