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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18. 2024

끝에 이르러

마중이 있었다. 섬은 밝지 않았지만, 공덕은 사람 셋이 땅 위에 서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늘 그랬듯, 생쥐는 어둠 속에서도 유려하게 헬기를 평평한 곳에 안착시켰다.


“수고했어.”


“피곤합니다, 실장님. 오늘 안으로 돌아가요, 우리.”


생쥐가 목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그래, 노력할게. 조금만 기다려.”


대답한 공덕은 잠들어 있는 마홈의 안전띠를 조심스레 풀어냈다. 마홈은 깊게 잠에 빠진 듯 보였다. 공덕은 마홈의 옷가지를 손으로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헬기의 문을 열고서 마홈을 들어 등에 업었다. 헬기에서 내린 공덕이 몇 걸음 가지 않아,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홈아!”


여자의 목소리였다. 공덕은 한숨 쉬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흑, 마홈…”


아이와 가까워졌음에도 여자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공덕은 손을 앞으로 뻗어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인. 놀다 지쳐 잠이 든 것뿐이에요.”


공덕의 부드러운 말투에도 여자는 계속 어쩔 줄 몰라 하며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로 흐느꼈다. 공덕은 몸을 돌려 마홈이 잠든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마홈을 여자에게 넘겨주진 않았다. 얼굴을 보여 준 공덕은 금방 몸을 돌려 버렸다. 그 짧은 찰나에 공덕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지금 마홈의 어미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면 정말로 자신이 납치범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덕은 여자의 옆으로 갔다.


“회장님도 나와 계십니까?”


“네, 네. 나와 있으셔요. 아이의 아빠도 함께요.”


“일단은 그리로 가시죠.”


“네…”


이후로도 여자는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 공덕의 등에 있는 마홈을 만지고 싶은 듯 보였지만, 여자는 공덕이 무서운 듯 내민 손을 자꾸만 아래로 내렸다. 길은 어두웠다. 등대의 백색 불이 돌고 돌아,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 닿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았다. 여자는 마홈을 보느라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공덕 역시 실없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가만히 걸음을 맞춰 주는 것이 여자를 위하는 것이라고 공덕은 생각했다. 남현과 밀코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현은 대부처럼 장우산을 발 앞에 세워 있었고, 밀코바는 글쎄, 연기를 하는 것인지 그냥 평범히 그의 옆에 서서 두 사람이 오는 길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홈을 제외한 넷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셨습니까, 공덕 씨.”


밀코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공덕은 대답했다. 그리고 공덕은 옆에 있는 남현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그래, 이제 끝이 났구먼. 일도 마무리됐고. 음, 우선은 사과를 드려야겠지요. 두 분 내외에게. 이런다고 마음이 풀리시진 않으시겠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일전에 약조를 하였으니, 빠른 시일 내에 이 친구를 통해 그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네 사람이 뭉쳐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공덕은 남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홈을 여자에게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섬 위의 사람들은 별말 없이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공덕은 남현의 뒤로 한 걸음 정도 떨어져서 내외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슬쩍슬쩍 바라봤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들과 멀어지고 나서 공덕은 입을 열었다.


“연 집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저 외국인, 나를 닮았더군.”


“밀코바, 그의 이름입니다. 타국에선 꽤 재능 있는 희극인으로 알려져 있던 사람입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혹, 회장님께 이상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습니까.”


“공덕아, 인생은 연기야. 자기 딴엔 내게 거짓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의 화를 돋울 법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


“저는 화를 냈었습니다.”


공덕의 말과 동시에 남현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갤 돌려 공덕을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남현은 공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공덕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말이다.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게 그네들의 원동력이거든. 화를 내는 네 모습 하나만으로도 삶을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앞으로는 달리 행동하도록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종일 불을 쫴 몸은 따뜻하지만, 마음이 차다.”


주유를 마친 생쥐가 깍듯한 자세로 남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현이 먼저 오르고, 공덕이 그 뒤로 헬기에 올라탔다. 남현은 눈을 감았다. 그를 확인한 공덕은 몸을 늘어뜨리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공덕은 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불이 꺼져 있지 않았다. 그를 본 공덕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끝났지만, 저들은 끝난 것이 아니겠지. 회장의 말대로 보상을 기다린다? 아니, 저들은 그렇지 않을 거야. 저들은 그저 다신 우리와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테니까. 오늘은 정말 피곤하군. 나도 그만 눈을 붙여야겠어.’


그리고 공덕은 생쥐를 향해 속삭였다.


“여기 불 좀 꺼 주라.”


“예, 실장님. 도착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생쥐는 뒤의 좌석과 이어지는 작은 창을 닫은 뒤, 불을 껐다. 조용했다. 남현의 숨소리는 자는 게 맞는 듯 보였지만, 확실치 않았다. 공덕 역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생각이 많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정적 속에서 공덕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후 두 시쯤부터 울리기 시작한 전화. 못해도 백 번은 넘었을 것이다. 그것도 놀이공원에서부터 마홈이 알아차리기까지의 횟수였다. 전화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제일 처음 공덕에게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가현이었다. 연희에 의해 생긴 죄책감을 엎치고 덮칠 대로 이고 있던 공덕은 가현의 전화를 무시했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 뒤로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가현은 자신의 상황과 남현이 행해 온, 행하고 있는 모두를 공덕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홈이 본 전화를 손에서 떼지 않는 공덕의 모습이었다. 매표소의 여직원. 그녀는 만약을 위한 공덕의 안전장치였다. 공덕은 마홈이 관찰을 통해 시간을 강박으로 삼고 있는 걸 알았기에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홈이 자신이 본 것을 생쥐에게 말한 순간은 순전히 운이었다. 전화를 만지던 공덕은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냈다. 공덕은 슬며시 눈을 떠, 눈앞의 남현을 응시했다. 살기 있는 눈임과 동시에 동정심이 섞여 있는 눈이었다. 공덕은 특히 남현의 주름에서 동정을 느꼈다. 연장자에 대한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남현의 주름을 응시하던 공덕은 생각했다. 사모님을 놓지 못한 집착이 회장님을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라고.


“…실장님, 실장님!!!”


생쥐의 다급한 목소리는 공덕이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렸다. 소리를 들은 공덕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남현의 얼굴이 주황빛으로 덮여 있었다. 남현의 시선이 헬기 밖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를 본 공덕은 침을 삼키며 고갤 돌려 창밖을 내려다봤다. 말 그대로 화마였다. 정원에 자리한 한 쌍의 조각상이 파편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저택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만이 존재할 뿐, 소방차는 보이지 않았다. 재가 돼 버린 광활한 저택이 입을 벌린 채 하늘 위로 불씨를 내뿜고 있었다. 치솟는 불길이 바람에 휘청이는 대로 남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장님!! 실장님!! 착륙할 수가 없습니다! 어서 지시를!”


생쥐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답은 공덕이 했다.


“돌려.”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리고 그때, 남현이 입을 열었다.


“어이.”


남현의 목소리에 생쥐와 공덕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남현은 공덕을 보고 있었다. 흔들리던 눈동자에 떨림이 사라져 있었다.


“알고 있었나.”


공덕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어째서?”


남현의 목소리는 속삭임 같았다. 만약 죽은 뒤에 길이 있고, 만약 그곳 앞에 악의 형상을 한 무엇이 서 있다면, 그것에게서 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 광경을 보여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는 일, 그리고 자식에게서 부모를 빼앗는 일.”


공덕의 말에 남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현은 공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헬기가 휘청였고, 생쥐가 소리쳤다.


“회장님!! 여기선 안 됩니다. 저희 모두 죽습니다!!”


“복수라고? 네놈이 이제 와 복수?! 네놈이 저 저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냐고?!!”


공덕은 남현이 붙든 목덜미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현과는 정반대의 얼굴로, 정반대의 감정으로써,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어찌 부모를 빼앗긴 사람이 저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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