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은 밖으로 내보낸 하녀들 모두에게 전부를 챙길 만한 시간을 쥐여 주진 않았다. 한 가지 시간만을 제공했다. 미련에 대비할 시간. 가현이 시안을 잡아두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으로 한 명의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노인이었다. 노인을 발견한 시안은 흥분했다. 분주한 분위기 속의 저택의 1층,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치는 와중에도 시안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히 퍼져 나갔다.
“당신을 저주해!! 당신을 저주한다고!!!”
흘깃하는 사람은 없었다. 1층의 모두가 시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노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시안은 더욱 소리쳤다. 그리고 가현은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짝!!’
“소리쳐도 된다고 한 적 없어. 착각하지 마. 네년 주인은 노인이 아니라 나니까.”
시안은 가현에게 맞은 뺨 위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저 시안은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비 완료됐습니다, 아가씨.”
가현의 옆으로 온 노인이 말했다.
“…뭐?”
시안은 노인과 가현을 번갈아 봤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시안은 가현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 이 노인의 꾐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진 모르겠지만, 함정이에요.”
“반대야.”
가현은 말했다.
“네?”
“내가 꾄 거라고. 이 노인을.”
시안은 노인을 바라봤다.
“미안하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아가씨! 속고 계신 거예요. 이 노인은, 아니…”
“네가 안내해. 나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현의 말을 들은 시안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또한, 자신의 기량으론 놀란 마음을 숨길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시안은 결정했다. 느낀 그대로를 얼굴 위로 드러내기로. 그리고 가현을 향해 말했다.
“정말 다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어떻게? 회장님께서는 분명 궁의 집사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노인이 말을 밀어 넣었다.
“날세.”
시안은 노인의 눈을 보고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시안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안은 다시 고개를 들어 노인의 눈을 바라봤다. 노인의 눈은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감정이 들어 있는 눈이 아니었다.
“목공수 이야기를 기억하나.”
시안은 금방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잡했고, 그를 떠올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네가 말했을 거야. 그런 곳을 만들어 놓고서 홀연히 떠날 수가 있겠느냐고.”
노인의 말에도 시안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시안은 어렴풋하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그런 시안을 눈치챈 듯, 계속해서 상기해 주기를 바라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단호히 말했었지. 만약에 너 자신이 이런 장소를 지었더라면, 쉽게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 맞아. 난 떠나지 못했네.”
“내가 지은 거야. ‘버섯’, ‘궁’, 모두를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나.”
시안은 속으로 단말마를 내뱉었다.
‘……아아.’
그리고 하나둘 생각이 떠올랐다. 버섯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굵다란 나무들 사이에 어우러진 집들을 감탄하며 노인에게 말하였던 일들. 그리고 노인이 자신에게 말해 준 어느 목공수의 이야기.
‘그렇구나.’
그리고 시안의 눈도 노인의 눈처럼 텅 빈 눈으로 변하였다.
“안내해. 네가 할 일은 그거야.”
가현은 시안을 향해 말했다.
“…왜 저에게 길을 안내하라는 건가요?”
“네가 집사니까.”
“노인에게 시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시안의 대꾸에 노인이 대답했다.
“아, 나는 모르는 일일세. 하도 오래돼서 길도 잘 몰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쇠가 나에겐 없거든.”
노인의 말에 시안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정말, …정말 잔인들 하시네요. 처음부터 저는 이렇게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사람이었던 건가요. 이런 저라고 힘들지 않은 줄 아세요? 힘들었어요, 저도. 하루하루가 너무도 길게 느껴져서 잠에만 기대었다고요. 아가씨의 어머님이 식물인간이란 걸 알았을 때, 그리고 회장님으로부터 그분과 친해지란 말을 들었을 때, 제 기분이 어땠는지 가늠이나 가세요? 아가씨, 어르신. 저도 힘들었다고요.”
노인이 시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것을 가현이 막았다. 그리고 아주 냉정하고도, 냉소적인 목소리로 가현은 말했다.
“내 알 바 아니야.”
시안이 소리쳤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 오늘부로 그 모든 걸 끝내려는 거니까. 너도 편히 쉬게 될 거야. 어물쩍댈 시간 없어. 빨리 앞장서.”
시안은 내몰린 상황과 가현의 재촉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드는 한편, 이대로 흘러감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시안은 생각했다. 내가 말릴 방법은 없는 걸까. 다른 길을 안내할 순 없을까. 생각하는 시안의 얼굴 곳곳이 일그러졌다.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적어도 지금은 저밖에 없는 거죠. 제가 열쇠를 드리기 싫다고 말하면, 아가씨는 문을 열 수 없어요.”
시안의 도발적인 말. 하지만, 가현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제가 열쇠를 드리지 않으면!”
“너는 말을 잘못하고 있어. 너는 내게 다른 말을 해야 해. 끝을 어떻게 내려는 것인지를 묻거나, 끝이 난 뒤에 자신의 안위는 어떻게 되는지 따위를 물어야 맞아.”
가현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저택은 가현의 목소리가 울릴 만큼 조용해져 있었다. 저택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남자들도 이제 몇밖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7명의 남자. 그들은 이제 둘이나 셋으로 짝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행동이 몹시도 분주했다. 서로서로 소리를 지르며, 지시의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때, 그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1층을 울렸다.
“구석구석 남김없이 채워! 빈 곳이 있으면 안 돼!”
목소리를 들은 시안은 눈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남자의 손에 집게가 달린 긴 막대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다른 손에는 무전기가 쥐여 있었고, 남은 손가락으로는 큰 봉지를 잡고 있었다. 그를 본 시안은 다시 가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현의 눈은 여전히 시안에게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았다.
“저것이 뭔가요?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죠?”
“열쇠를 넘겨, 그럼 말해 줄게.”
“아뇨. 설명부터 듣고 싶습니다.”
“쌍년이.”
상황을 보고 있던 노인이 결국은 시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얘야, 그만 열쇠를 넘기려무나.”
“네가 왜 그렇게 내 아버지에게 충성하는지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 이유가 있다면 지금 말해. 덜미를 잡힌 거라면 그것 역시 오늘만큼은 내가 다 지워 줄 수 있어.”
“약속을 했어요.”
“무슨 약속?”
“아가씨의 어머님과 한 약속이에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정말이에요. 다음에 만날 때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기로 약속했어요.”
시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현은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가현의 웃음에 노인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대단하다, 정말. 너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솔직히 놀랐어. 아버지는 그렇다 쳐. 근데 너는 아니잖아? 너는 남이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그 사람과 너는.”
“있어요, 이유. 전 부모도 없고, 주위에 아무런 사람도 없는…”
“고아라서? 야, 정신 차려. 애정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게 아니야. 십수 년을 말도 못 하고 누워서 연명 중인 사람한테서 무슨 감정을 느낀다는 거야?”
그제야 시안은 깨달았다. 가현에겐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정말 조금도 존재하지 않구나. 시안은 우울감이 몰려왔다. 그럼, 자신은 뭘까.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시간만을 그녀와 보낸 자신이 이다지도 아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일인 걸까. 시안은 혼란스러웠다.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시안은 힘을 주어 쓰러지는 것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시안은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시안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비웃는 건가, 시안은 생각했다.
“결정했어?”
가현의 재촉과 노인의 격려가 이어졌다.
“아가씨 말을 들으렴. 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시안은 한 번 더 고갤 돌려 남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들은 이제 움직임이 느려져 있었다. 하녀들은 이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저택에는 가현과 노인, 시안, 남자 일곱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안은 천천히 가현과 노인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릴게요, 열쇠. 단, 조건이 있어요.”
가현은 대답 대신 턱을 위로 한 번 까딱거렸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