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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제리의 변명

“너희라는 단어는 확실히 악에 받쳐 사용한 문구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죠. 당시에는 눈이 돌아가 있었으니까요. 옳고 그름의 판별은 제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억지일지라도 접점을 찾기만 하면 되었죠.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 화가 났습니다.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도요. 머리로도 모자라 손과 발까지로 뻗어나가는 화는 제가 굴복할 상대로 충분하고도 남더군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은 몸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는 제명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죽겠구나, 라고요. 한 번 죽음을 떠올리니 그 뒤는 자연스럽게 따라붙더군요. 두려움에 절여 있던 머리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목표를 세우고, 실행할 일들을 노트에 적어 나갔습니다. 처음부터,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았죠. 맨 처음 실행한 것은…”


제리는 순간 목이 멘 듯 말을 멈췄다. 그리고 딘이 계단으로 향하자, 무엇을 하기 위한 발걸음인지 안다는 사람처럼 그의 뒤를 붙잡았다.


“물은 괜찮습니다. 사레가 들린 것뿐이에요.”


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딘 씨는 다정하신 분이시죠. 또, 새로이 아침을 맞은 차고의 공기가 어떤지를 아시는 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저를 위해 물을 가지러 가는 것이겠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하시군요.”


제리가 딘이 기대어 있던 난간으로 몸을 옮기며 말했다.


“아양 떠는 것 하나로 1번지까지 올라온 사람이니까요. 바다를 빌려 표현한다면, 저는 망망대해의 돛단배입니다. 형태 없는 모든 풍파를 겪어 봤죠.”


“아양이란 표현을 쓴 것에 있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리는 손사래 쳤다. 그러고는 꽁초를 떨어뜨렸던 1층을 내려다보며 한숨과 함께 말을 길게 뱉어냈다.


“틀린 표현도 아닙니다. 그리고, 안 좋았던 일들에 대한 화해는 이미 서로 끝마쳤잖습니까. 물론 좀 더 나은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이지요. 긴장이 저희를 뒤덮고 있었고, 불안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으니까요. 저였어도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제리는 고개를 돌려 딘을 바라보았다.


“아, 잡설이 길어졌군요. 이어서 말을 하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실행한 것은 동료들의 이름 작성이었습니다. 함께 담배를 피웠던 사람,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 함께 담소를 나눴던 사람. 이름을 적으니 그들이 꿈에 나오더군요. 아주 건강하고, 멀쩡히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요. 꿈을 꾸는 순간만큼은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는 그 순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죠. 그래, 다들 죽었지. 다시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채워집니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실제로 죽음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언제, 어디서나, 그들의 혈흔이 보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트라우마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죽었을 게 뻔한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시간이 흐를수록 저의 환시가 악화되었고, …뭐, 결국은 이런 겁니다.”


딘은 조심스레 제리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무엇입니까?”


제리는 다시 담배 케이스로 손을 가져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특히 검지 쪽의 떨림이 유독 심했다. 제리는 두어 번 담배를 놓치다, 결국은 안 되겠는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어 입술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손바닥 뒤로 불꽃이 일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얇은 빛줄기에, 앞서와 같은 어둠이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연기가 퍼지는 곳으로 노랗게 변한 먼지가 아른거렸다. 제리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길었던 변명을 마쳤다.


“자책감, 분노, 투쟁심.”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편지를 보낼 때의 저와 지금의 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괜찮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무뎌졌죠.”


그리고 제리는 담배를 쥔 손을 배꼽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충분한 변명이 되었을까요.”


딘은 제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모호하던 짝이 맞추어졌달까. 제리 씨께서 그 같은 편지를 쓴 이유와 시티 밖 사람들을 보험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이젠 제가 보험이라고 표현한 것을 사과할 차례인 것 같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화를 내지 않으셨던가요?”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제리 씨께서 그들에게 선함을 베풀었다는 것과 일을 그만두시게 된 구체적인 까닭까지. 모두.”


딘의 말에 제리는 쓸쓸한 표정으로 재를 털었다. 그 모습에 딘은 잠시 망설임이 들었지만,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말문을 뗐다.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편히 물어보시죠.”


“제가 알기로는 그날 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시티로 들어오는 58번지의 끝자락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통조림 창고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이 아닌지요?”


“맞습니다. 도망자들의 비명이 들리기에도 거리가 있는 곳이죠.”


제리의 대답에 딘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셨습니까? 왜 하필 창고에 일하는 사람들만을 추려내 따로 학살하였는지.”


“그게 제 두 번째 일이었습니다. 이유를 찾는 것.”


제리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어딜 가나 위축된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거든요. 평소라면 반가이 인사를 나눴을 절친한 친구조차도 땅을 보며 걸음을 내밟더군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이후에 그 친구의 아내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저로서는 줄 수 있는 게 없었죠.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의 행방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무자비하게 총질을 휘갈기던 가더들은 피 묻은 손을 고스란히 흔들며 거리를 걸어 다녔고, 그를 볼 때마다 저는 쪼그라들었습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본능적인 공포심이었다고, 그러니, 나의 위축 또한 당연한 것이라고, 밤마다 최면을 걸었죠.”


딘은 심하게 떨리는 제리의 손을 바라봤다.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페퍼 씨에게 말입니다. 두 분은 보다 각별한 사이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제리는 소리 내 웃었다.


“그녀는 말이 없어요. 언제부터인가 자기주장마저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죠. 그런 사람에게 속마음을 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더군요. 내가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이 사람은 듣기만 하는데, 라고요.”


“그럼, 그런 그녀를 이끌고 1번지까지 올라온 이유는 왜죠?”


딘의 물음에 제리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진심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딘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때 저의 속사정을 모두 품어 준 유일한 여자입니다. 정말이지 귀한 사람이에요. 첫 만남부터, 처음으로 잠을 잔 그 순간까지, 그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란 듯한 얼굴과 어울리는 성격이더군요. 58번지에 배정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화를 내야 하는 때와 화를 참아야 하는 때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매료되기 충분했죠.”


그에 딘은 물었다.


“그랬던 페퍼 씨가 갑자기 변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리는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뿜어내며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변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변한 건 아니지만, 그 원초가 이유를 찾는 일부터였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유? 통조림 창고 말씀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거기서부터 저희 둘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톱니바퀴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죠.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58번지에 사는 그 누구보다 힘이 차 있었습니다. 길가를 서성대는 가더도, 항시 누군가를 겨누고 있는 듯한 그들의 총구도, 두렵지 않았죠.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보이는 시민의 얼굴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적의 나날을 보내다 남자인 제가 먼저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페퍼는 저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제리는 필터까지 검게 타 버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멀리 튕기었다. 손이 아직까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딘은 코트의 주머니에서 다비도프 클럽 하나를 꺼내 제리에게 내밀었다. 제리는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한 뒤, 여전히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불을 붙였다. 딘은 뒤따라 같은 것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직전에 지나간 제리의 표정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의식이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거야.’


무의식이 말했고, 딘은 그것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제리 씨를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믿음이라,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펍에 모이는 날까지도 거의 말을 섞지 않았거든요. 섹스는 물론이고요. 여러 차례 변화를 시도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특별한 거라고는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죠. 아침 9시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창을 열어 전 날의 공기를 내보내고, 실로 공허한 아침 식사를 식탁에 마주 앉아 입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인사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죠. 그리고 그것이, 해가 있을 때 볼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리곤 곧장 차고로 오시는 거군요.”


“예, 그런 셈이죠.”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지금껏 본 페퍼 씨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없어 보였거든요. 여전히 꿈을 품고 계신 눈망울이 아름다우셨죠.”

     

제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이라…, 아직도 품고 있을까요.”


“네. 예전에 본 눈과 정확히 같으셨어요.”


“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입니다. 더군다나, 딘 씨의 관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시니까요. 눈을 감고 떠올리시는 신비로움에 가까운 기억력도 한몫하시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겁니다. 저희가 조금 전 서로의 오해를 풀었듯이 말입니다.”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 아래로 숙이어 있던 몸을 돌렸다. 수심 있던 얼굴이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줄곧 이어지던 딘의 추궁에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마찬가지.


“이것 참 괜찮은 시가이군요. 장벽에 올라, E구역의 경치를 눈에 담으며, 피우면 아주 환상이겠습니다.”


제리가 회색빛으로 길게 매달려 있는 재를 난간의 손잡이에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딘은 제리의 말에 만 퍼센트 동의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지막 하나가 담겨 있는 시가 케이스를 비밀스러운 손길로 문질렀다.


“제리 씨.”


“예.”


“괜찮으시다면,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제리는 아마 양보한 것일 테다. 딘이 질문할 거라곤 뻔한 거였으니. 그러나, 딘도 이미 그 수를 읽고 있었다.


“그날 말입니다. 모두가 장벽에 모이는 그날. 제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서질 않아서 그런데, 제리 씨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말이죠. 하지만 또, 질문하기 껄끄러운 주제라는 생각이 드는지라…, 뭐랄까, 좀체 입이 떨어지질 않는군요.”


딘은 문장 하나당 거의 10초를 사용했다.


“무엇이 궁금하시기에 그리도 뜸을 들이십니까.”


제리는 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간단한 질문입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기도 하고요.”


“준비되었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그리고 딘은 제리와 마찬가지로 재를 부드럽게 떨어뜨린 다음, 다른 한 손에 마치 위스키 잔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손목을 돌렸다.


“500명이 모일 거라고 말씀드렸었는데, 혹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리프트의 길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죠.”


“네. 그리고 그 말이 나왔던 당일 밤, 잠을 자는데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더군요. 500명이 정말로 모인다면, 장벽의 위쪽이 위험할까, 장벽의 아래쪽이 위험할까.”


그에 제리가 물었다.


“정도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네.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장벽 위, 무엇이 있을지 확실한 장벽 아래, 제리 씨는 어느 쪽이 더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음을 건넨 딘은 칠흑같이 고요하고도 차분한 눈빛으로 제리의 표정을 살폈다. 긴 대화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퍼즐이었다. 소년의 손을 빌린 편지, 시티 밖 사람들을 향해 날린 글귀, 그럼에도 그들에게 도움을 건넸던 역설적인 제리의 행동. 그리고 딘은 생각했다. 이 질문에 대한 제리의 대답 속에 그 모든 해답이 들어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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