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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납치1

퓨티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눈앞이 번쩍했다는 것. 그리고 고통에 겨워하는 워블의 목소리가 높은 곳으로 하염없이 올라갔다는 것. 퓨티는 감긴 눈을 뜨기에 앞서, 이 같은 감정을 언젠가 한 번 겪어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온몸에서 느껴지는 작은 이물감들은 잘게 잘린 모래의 일종일 것이라 단정 지었다. 특히 팔과 뺨이 보내는 신호에 퓨티는 거의 확신했다. 퓨티는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는 신경을 단번에 곤두세웠다. 쫓김과 도망의 경험치를 극한의 상황에서 터득한 퓨티였기에,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심장이 곧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수축되어 있던 근육들이 차례대로 잠에서 깨어나 두근거렸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경련이 멈추자, 퓨티는 숨을 죽인 채 눈을 떴다. 빛을 품은 하얀 가루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퓨티는 아름다움이란 모순적인 단어를 떠올리며 뺨에 묻은 가루들을 손으로 털어 냈다. 워블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는 최소한의 흔적조차 없었다. 퓨티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퓨티는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가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걸음을 내딛는 시점에서, 아름답게 보였던 가루들이 사실은 고통을 안겨 주는 작은 악마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뾰족한 가루가 퓨티의 발바닥을 파고들었다. 퓨티는 너무도 큰 아픔에 걸음을 멈추었지만, 입술을 깨물고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퓨티가 갇힌 곳은 작은 방이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는 굵은 철창 세 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철문이 있었는데, 안쪽의 순백과도 같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문짝이었다. 퓨티는 어떻게든 고통을 참으며,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발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으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퓨티는 문에 바짝 몸을 기댄 채 귀를 가져다 댔다.


“이 여자들이 아니면 어떡하지?”

     

“아냐, 확실해.”


“하지만, 저 나이 든 여자가 말하는 거로 봐선 확신을 갖긴 어려워. 너도 들었잖아.”


“탁한 목소리에 겁을 먹었군.”


그리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퓨티는 더욱 몸을 밀착시켜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지만, 말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보다 확실하게는 정적에 가까웠다. 만약 퓨티가 납치라는 상황과 단어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적어도 문에서 떨어지는 시늉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퓨티는 안으로 넘어졌고, 온 힘을 실어 문을 걷어찬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퓨티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눈가에 검은 칠을 한 남자였다. 그는 혀를 날름거리며 퓨티 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껄렁한 걸음걸이로 바깥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퓨티는 아픈 배를 움켜쥘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빈손이던 손에 무릎 높이 정도 되는 나무 의자가 들려 있었다. 퓨티는 가루에 쓸려 붉게 달아오른 허벅지를 움직여 어떻게든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그 모습에 남자는 의자를 퓨티의 앞에 내려놓고는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 예쁜 아가씨의 이름과 나이는 차차 알아가는 거로 하고.”


그리고 남자는 또다시 침을 뱉었다. 침은 정확히 퓨티의 얼굴에 떨어졌다. 이어서는 거슴츠레한 표정과 함께 성교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을 보였다. 퓨티는 가만히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그라미 속으로 열렬히 침을 묻혀 가며 반대 손 검지를 쑤셔 대던 남자는 퓨티가 반응하지 않자, 하던 짓을 멈췄다. 그리고 앞서 놓아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재미없나 보네.”


남자가 퓨티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퓨티는 무섭지 않았다. 단지, 남자가 하던 더러운 희롱을 그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닦아 줄까?”


퓨티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조용히 준비했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려고 한다면, 오른손에 움켜쥔 하얀 가루를 그의 눈에 사정없이 문지르겠다고.


“뭐, 대강은 이해하지? 이런 걸 너랑 같이 온 늙은이한테다 할 순 없으니까 말이야. 예의가 있지.”

     

그리고 남자는 덧붙여 말했다.


“아무리 굶주린 남자라도 자기 씨 뿌릴 자리는 보는 법이거든.”


퓨티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떻게 했어?”


“오!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너?”


“난 또 벙어린 줄 알고 계속해서 네 오른손만 주시하고 있었지, 뭐야. 아니라 다행이다. 노인네랑은 영 대화가 통하질 않아서.”


“어떻게 했냐고 묻잖아.”


“걱정하지 마. 그냥 대화를 좀 했을 뿐이야.”


“만나게 해 줘. 확인해야겠어.”


그에 남자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전에 조건이 있어.”


“조건?”


“너희들이 하려는 게 뭔지 말해. 그럼, 두 사람 모두 별 탈 없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


예감이 확실시되는 순간. 퓨티는 당황하지 않고, 모든 신경을 입가로 끌어모았다. 어떤 대답, 어떤 말투, 이 남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부터 우리를 발견하고, 또, 그 뒤를 뒤쫓았는가.


“말하지 않는다면요?”


“고통을 느끼게 되겠지?”


“그래도 말할 수 없다고 하면요?”


“너, 몇 살이야?”


“열일곱이요.”


“그래? 그럼 열여덟의 삶을 살아 보지 못하고 죽게 될 거야.”


“집요하시네요. 그리고, 비겁하세요.”


퓨티의 말에 남자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노인이랑 애를 상대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긴 해.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도 우리대로 사정이 있는걸.”

     

“언제부터였어요?”


퓨티는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린 얼굴의 침을 긁어냈다.


“뭐, 너희 두 사람을 미행한 거?”


“네.”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너랑 저 할망구의 옷차림을 보고도 알 수 있었고, 시티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네년 눈깔로도 알 수 있었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너랑 저 할망구가 타고 온 트럭이 결정적이었지. 단종이 돼도 한참 전에 단종된 차량이거든.”


그리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퓨티를 향해 쐈다.


“그날 계셨었나 보네요. 58번지에.”


“응. 운이 좋았지. 너희 입장에선 운이 더럽게 없었던 거고. 그걸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갈피를 못 잡고 있었어. 분명 어딘가에서 꿉꿉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위치가 안 보였거든. 그래서 나는 너희를 경멸하는 한편, 감사를 느껴. 지금이라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니요. 운이 없으신 건, 그쪽이에요.”


남자의 반응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지겹고, 피곤하다는 얼굴.


“무슨 뜻?”


“가장 중요한 걸 알아내지 못하셨잖아요. 불운하게도.”


퓨티는 이 느슨한 분위기가 언제고 돌변하여 자신을 덮칠까 두려움에 휩싸인 지 오래였지만, 이미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에, 자신의 모든 걸 바치기로 했다. 그리고 잊지 않고 떠올렸다. 떨림이 그치지 않던 워블의 모습과 장벽을 오르려는 당돌한 소년의 목소리를. 그래, 두 사람이면 충분했다. 퓨티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를 본 남자는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를 커다란 손으로 번쩍 들고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있는 힘껏 퓨티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퓨티는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에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남자는 산산조각난 의자를 바닥에 냅다 던지고는 피가 묻은 나무 파편이 있는 쪽으로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그 건너의 방.

     

“어떻게, 이제는 다른 말씀을 하실 생각이 좀 드십니까?”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말했다.


“…난 분명 너희에게 기회를 줬어.”


워블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회라…, 저는 여사님으로부터 어떤 기회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만.”


그 말에 워블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 말했잖아. 네가 우리로부터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나가게만 해달라고.”


남자는 혀로 입 안 구석구석을 굴리며 꼭 맛없는 사탕을 먹듯이 워블의 말을 천천히 음미했다.


“제가 원하는 답을 해 주시기 전까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그 앞으로도. 영원히.”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워블은 큰 목소리로 웃었다. 남자는 워블을 따라 웃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내리며 정색했다.


“마음대로 하도록 해. 난 손해 볼 게 없어. 젊은 남자가 자기의 귀중한 시간을 써 준다고 하는데, 싫어할 여자가 어딨겠어. 오히려 환영이야.”


그리고 워블은 붉게 물든 눈을 남자에게로 부라리며 말했다.


“시티 밖으로 나가 본 적 있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시도는?”


“없습니다.”


“겁쟁이네.”


그 말에 남자의 왼쪽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시간 끌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 미안. 네가 영원이라는 단어를 쓰는 바람에 내가 들떠 버리고 말았어.”


“자, 계속해.”


워블은 남자의 손을 보며 등을 내밀었다. 기다란 생채기의 합이 총 다섯이었다. 옷의 실오라기가 보였으며, 살갗은 찢어지고, 피와 노란 진물이 뚝뚝 떨어져 등과 허리 전체를 물들여 있었다.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세를 취했다. 왼쪽 팔이 거의 오른쪽 뺨에 닿을 듯했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동작으로, 반동을 실은 오른손의 채찍을 워블의 등에 내리꽂았다. 워블의 비명 섞인 쇳소리가 다시 한번 어딘지 모를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 뒤로 연달아 한 번, 두 번, 세 번. 워블이 제아무리 독한 여자일지라도 여덟 번의 채찍질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몸이 먼저 중심을 잃었고, 다음으로 의식이 날아갔다. 남자는 채찍 쥔 손을 이끌고서 워블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바닥의 먼지를 쓸 듯, 워블의 얼굴을 채찍의 끝부분으로 툭툭 건드렸다.


“쳇.”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천장의 조명이 줄곧 어둠에 숨어 있던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강직한 얼굴이었다. 눈은 거짓된 사람을 손쉽게 꿰뚫어 볼 만큼 깊이가 매서웠고, 코는 특별한 높이 그 이상을 웃돌고도 한참이 남았으며, 입은 필요에 따라 말투를 갈아 끼울 수 있을 정도로 가히 수평적이었다.


“이 여자에게 들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남자는 채찍을 손에서 놓았다. 말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굵다란 손잡이가 데굴데굴 구르다 워블의 발끝에서 멈춰 섰다. 남자는 의식 없는 워블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울린 타이밍이 절묘했다. 남자가 나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뭐야, 어떻게 됐는지 보러 왔는데 상황이 더 심각해졌네?”


검은 칠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쪽은?”


“기절했어. 이쪽은 너도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잖아? 그래도 어린년이 꼴에 담이 나쁘지 않더라. 침까지 얼굴에 뿌려 줬는데 말이지.”


“그럴 수밖에. 이들은 시티 밖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니까.”


“이제 어쩔 거야? 두 번째 계획이 있어?”


“쫓기지 않아도 돼. 시간은 우리 편이야.”


“그들이 이 사람들을 버리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만약에.”


“그때의 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


남자는 대답과 동시에 그의 몸을 문밖으로 밀쳤다. 그리곤 뒤로 돌아 문의 걸쇠를 단단히 잠갔다. 문이 잠기고, 둘만이 복도에 남게 되자, 검은 칠을 한 남자는 빠르게 말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다고? 그 대답을 떠올리라는 거야? 그건 아니지. 난 네가 하자는 대로 했어. 너만 따라왔다고.”


“호들갑 떨지 마.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올랐을 뿐이니까.”


그 대답을 들은 남자는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근데 왜 이 여자들이지? 아지트도 알아냈잖아. 다른 사람을 데려다 족치는 게 더 빠르지 않았어?”


“그들이 이들을 데려간 것과 같은 이유야.”


“그게 뭔데?”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하얀색 모자를 푹 눌러쓰며 대답했다.


“중요한 순간에는 필요한 존재이지만,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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