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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피리 부는 소년과 고가도로

마스는 손가락으로 장소를 가리켰다. 기사는 차를 멈췄고, 마스는 미터기에 찍힌 돈을 기사에게 건넸지만, 그는 이번에도 딘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스는 말없이 물건을 품에 안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미리 열어 둔 창문의 틈 사이로 돈을 던지듯 집어넣었다. 기사는 조수석에 떨어진 지폐를 내려보았다가, 선글라스를 벗어 창문 너머의 마스를 노려봤다. 마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마 기사가 꼬리를 내리지 않고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더라면, 마스는 평생 그곳을 지켰을 것이다. 택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거였으면, 트럼펫 청년은 죽지 않아도 되었으려나.”


그리고, 마스는 품에 안은 보따리를 소리 나게 다잡은 다음, 걷기 시작했다. 17번지의 풍경은 뭐랄까, F구역의 중간다웠다. 더럽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은 정도. 딱 정중앙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그러했고, 주택과 상가의 구분 지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중간이었다. 한마디로 궁핍 속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곳이었다. 18번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마스는 고개를 들고 자신감 있는 발걸음을 이어 나갔지만, 무언가에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자동차, 건물, 그 모두를 무시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를 말해 주고 있었다. 기사와의 대화가 마스의 머릿속을 확실히 휘저은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마스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다가 또 한 번은, 두 다리를 완전히 바닥에 멈춰 세우기도 했다. 그때에는 한숨 소리가 함께였다. 그 한 번을 끝으로 마스가 멈춰 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마스의 머리 위로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18번지의 밤에서 본 곳과 비슷하게 생긴 장소였다.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다리 아래 터널의 입구와 출구로 빛이 들고 있다는 것. 마스가 들어서자 출구 앞에 있던 사람부터 수군거림을 멈추기 시작했다. 마스의 눈은 여전했지만, 그늘이 그를 가려 주었다.


“일찍 오셨네요!”


무용수 여자가 무리 깊숙한 곳에서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남자 단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마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무나 좀 거들어 주시겠습니까. 짐이 깨나 무겁습니다.”


마스가 말했다. 무용수는 가만히 있었고, 가까이 있던 남자 몇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보따리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마스는 손바닥을 비벼 먼지를 턴 다음, 원래의 근엄한 리더의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떠날 준비를 하세요. 오늘 공연은 취소입니다.”


수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무용수 옆에 있던 깡마른 안경잡이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건가요?”


그의 말에 단원들의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니요. 몸이라면 좋습니다. 아니, 이보다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군요.”


“그럼, 무슨 이유로…”


마스는 말끝을 흐리는 안경잡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1번지로 직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누가요? 어느 악단입니까?”


“악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려 34번지부터 1번지까지를 직행했더군요.”


그리고 무용수가 구석에서 빠져나와 물었다.


“악단이 아니면, 저희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요. 애초에 그들은 34번지에서 출발한 게 아닙니다. 구역의 끝, 58번지에 사는 이들이거든요.”


무용수가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마스는 고갯짓으로 무용수에게 허락을 표했다.


“1번지로 바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요? 이동 수단도 없고, 무엇보다 가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저희가 준비한 곡들도 순서가 엉켜 버리고요.”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걸 모두 정리했어요. 시간과 비용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것과 곡을 작곡한 여러분들의 노고도 포함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이 저를 계속 꾀고 있어요. 1번지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이니, 어서 빨리 떠나라, 라고요. 저는 제 직감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직감을 따라가 낭패를 본 기억도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께 목소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부탁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스는 품에서 지휘봉을 꺼내며 오른손을 단원들 앞으로 내밀었다. 지휘봉을 잡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단원은 없었다. 아예 마스가 선 곳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가 없었던 때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평소의 마스였더라면,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먼저 목소리를 높여 주의를 주거나, 호통을 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마스 스스로 아는 듯했다. 마스는 팔을 들고 기다렸다. 일체의 벙긋거림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속에서 마스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왔다. 마스는 이제 사물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멍했던 눈동자가 밤의 고양이처럼 매섭고, 하늘의 별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마스의 눈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깡마른 안경잡이였다.


“가겠습니다.”


안경잡이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수군대던 이들의 입이 동시에 닫히었다. 그리고 안경잡이가 마스의 지휘봉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밟자, 단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경잡이는 지휘봉을 잡지 않고, 곧장 마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안경잡이가 마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째 분위기가 딱딱합니다, 마스 씨.”


마스는 대답했다.


“트럼펫 청년 때문일 겁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고작 하루 전의 일을 잊을 사람들이 아니죠.”


“…그렇지 않아도 저기 첼리스트들이 그 일을 말하는 것 같더군요. 자기들은 뭐가 되냐며.”


“그래요?”


“…”


마스는 안경잡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시선이 집중되었고, 지휘봉을 쥔 마스의 오른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요동쳤다.

     

“드릴 말이 있습니다!!!”


마스는 첼리스트들이 있는 곳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감정을 얼굴에 모두 드러낸 채로 마스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눈치를 보던 다른 단원들이 조용한 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그래요.”


마스가 운을 띄웠다.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말하겠습니다. 어젯밤의 일입니다. 그 청년이 말했었죠. 곧장 장벽으로 가자고. 그리고 저는 규율대로 망설임 없이 그를 처단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죄가 없습니다. 모두가 저의 결정이었고, 저의 변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제 잘못이고, 제 변덕이며, 제게 한정된 죄입니다. 지옥에서의 벌도 제가 모두 짊어지겠습니다. 그리고…”


마스는 지휘봉을 들어 앞으로 나온 첼리스트들을 가리켰다.


“이 말은 그대들에게 바치는 참회입니다. 여전히 저를 좋지 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부탁이자, 요청입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고, 저를 탓하세요. 그대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지껄이든, 저는 신이 아닙니다. 감히 그분의 곁에도 인접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말을 줄이겠습니다. 그대들은 죄가 없습니다.”


다시 찾아온 침묵. 마스의 가까이로 온 단원들은 이제 더 이상 수군거리지도 못했고, 그를 경멸하는 듯한 눈빛도 비출 수 없었다. 마스의 말이 끝난 지금, 그의 옆에 선 안경잡이가 말을 보태고 싶은지 계속해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지만, 결국에 그는 용기를 내지 못 한 채, 열리지 않는 입과 자신의 한계에 통탄한 듯 입술 전체를 붉게 올라올 정도로 세게 긁었다. 마스의 지휘봉은 여전히 앞으로 뻗어 있었다. 오른손의 떨림은 사라졌다. 남은 건, 단원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의 눈은 재빨랐으며, 오고 가는 손동작도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수신호가 오간 뒤에, 첼로 연주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연주자 중 가장 풍채가 좋고,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들거나, 하는 것 없이 단원들 사이를 불도저와 같은 기세로 밀며 길을 만들었다. 그와 마스와의 거리는 금세 가까워져 일 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마스는 조금의 움츠림 없이 머리 하나는 훌쩍 넘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구체적인 방법을 말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스는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마스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1번지까지의 거리는 일반적으로 반나절 안쪽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동 수단을 이용했을 때의 시간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모두를 태울 만한 대형 차량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어떻게 차량 없이 남은 16개의 번지를 올라갈 것인가. 또, 그때까지의 식량과 비용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행여 틀리진 않았는지 여러 번 곱씹어도 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짜내 봐도 이것 이상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마스 앞에 선 남자가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스는 대답 대신 앞으로 뻗어 놓은 지휘봉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안경잡이와 남자를 제외한 모든 단원들 개개인과 살얼음 같은 눈 맞춤을 나누었다.


“가더들이 쓰던 고가도로를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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