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최최상위권
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돈 얘기부터 꺼내는 일은 터부시 했다. 그런데 하필 싱가포르와 미국, 스위스에서 살았다. 아시아의 스위스를 자칭하며 금융강국으로 부상하는 곳. 대외적으로는 다문화 국가지만 대내적으로는 인종에 따라, 가진 정도에 따라 계급이 뚜렷하게 나뉘는 곳.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가진 자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지만 못 가진 자의 삶은 한없이 비참한, 자본주의 종주국. 금융과 보험, 돈 놓고 돈 먹는 사업으로 강소국이 된 나라 스위스.
한때 나의 가치관은 바람에 부는 갈대 마냥 휘청거렸다. 새로운 나라에 정착할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돈이었다. 풍파를 제법 맞은 지금은 쉽게 돈 얘기를 꺼내곤 한다. 돈이 있어야 일상도 영위할 수 있는 법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스위스의 돈 얘기부터 해보려 한다. 스위스에 와 본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스위스의 물가를 안다. 여행의 꿀팁이라며 외식 대신 현지 마트 Migros나 Coop에서 요깃거리를 사 먹는 것을 추천하곤 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외식 한번 하면 최소 인당 5만 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수십만 원짜리 스위스 패스를 끊고, 융프라우나 마테호른을 가보고는 스위스가 여행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것이라 여긴다. 사실이다. 융프라우 올라가는 곤돌라 운영 회사 (Jungfraubahn Holding AG)는 스위스 주식 상장사이다. 그런데 여행업은 사실 스위스 GDP의 약 3%,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한다.
2023년 기준 99,565 미달러. 같은 해 우리나라 1인당 GDP는 33,121 USD. 딱 세 배 정도 된다.
1인당 GDP가 생소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의 GDP 세계 순위를 자주 논하고는 한다. 10위, 11위를 다툰다고. 한 국가의 경제규모를 볼 때는 GDP 순위가 유의미하겠으나, 실질적으로 국민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들여다보려면 1인당 GDP가 중요해진다. 물론 부가 얼마나 공평히 분배되었는가, GDP 대비 가계/기업 부채는 어느 정도인가 등 따져볼 요소야 많겠으나 오늘의 주제는 경제 토론이 아니니 이쯤 하도록 한다. 스위스의 1인당 GDP는 전 세계 최상위권이다. 스위스 앞으로는 리히텐슈타인이나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들이 있는데, 각각 인구가 4만, 66만이다. 인구당 백만장자의 비율도 압도적인 최상위권이다. 1인 소득의 중간값이나 평균값도 마찬가지다. 스위스는 인구가 900만 정도 된다. 서울 인구에 조금 못 미친다.
서울만 떼서 비교하면 수치가 좀 비슷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차피 서울에 모든 게 모여 있으니 서울민국으로 계산하면 어떨까. 쓸데없지만 궁금하긴 하다. 인구 밀도를 떠올리고 찾아보길 포기한다. 서울면적 605 km², 스위스 면적 41,285 km².
기름도 가스도 안 난다. 자원이라고는 인적자원뿐이다. 지형은 험준하고 땅은 척박하다. 음식을 보면 스위스 사람들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럴싸한 요리가 없다. 감자 아니면 치즈. 과거에는 용병으로 먹고살았던 나라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사람 장사해서 먹고살았던 것이다. 아직도 바티칸은 스위스 사람들이 지킨다. 아픈 역사의 단면으로 루체른에 가면 사자상을 볼 수 있다. 화살촉이 박혀 고통에 울부짖는 사자상이다. 용병 외에는 주변국 귀족이나 왕족을 대상으로 여행업을 했다. 오늘날에도 곳곳에 수백 년이 된 호텔들이 있고, wellness(잘 먹고, 잘 쉬는 것)와 hospitality(손님을 잘 맞이하는 것)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인적 자원으로 나라를 일궈 내야 했던 면에서는 한국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 스위스는 어떻게 이렇게 잘 살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