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라고 다 칼퇴 아닙니다.
타닥, 타다닥, 타닥, 타닥. 밤 11시, 남편의 노트북은 여전히 바쁘다. 띠리리링, 띠리링.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어김없이 알람은 울린다. 아웃룩 캘린더를 슬쩍 보니 오늘 하루 미팅만 8개다. 많은 날은 10개가 넘을 때도 있으니 위안 삼는다. 종일 회의만 하다 보면 업무를 할 시간이 없다. 야근 당첨.
우리는 서로 다른 3개 국어를 구사한다. 아주 후하게 쳐주면 4개라 할 수 있을지도. 많은 스위스 사람들이 3개의 언어는 유창하게 하는 편이다. 국어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총 4개다. 넷 중 하나는 모국어, 하나는 학교에서 의무로 배우고, 영어까지 총 3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쉬이 보인다. 물론 다 알파벳이니 솔직히 우리가 한국어, 중국어 (또는 일본어), 영어 하는 것보다 훨씬 배우기 쉽다. 스위스 사람들 왈, "독일어랑 불어랑 섞어서 쉽게 만들면 영어야." 거 참, 부럽네. 나는 영어 하나에만 중형차 한 대 값은 썼을 텐데.
세계 인재 경쟁력 지표(Global Talent Competitiveness Index, GTCI)가 있다. 스위스는 거의 매년 1위의 영예를 가진다. 아, 물론 이 지표를 스위스 기업이 낸다. 그래도 세계경제포럼 (이 또한 스위스에 있다.)에서 이 지표를 바탕으로 인재 경쟁력에 대한 보고서를 내기도 하고, 구글이나 나이키 같은 미국 회사들도 파트너이니 영 엉터리는 아니리라 믿는다. 스위스 사람들은 그럼 정말 일도 연구도 잘할까?
스위스에는 주변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넘어온 인재들이 넘친다. 생긴 것도, 언어도 비슷하고, 위치도 가까우니 높은 연봉을 주는 스위스로 오는 것이 매력적이다.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연구했다. 주변 유럽 국가들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인재들과 경쟁하기 위해 스위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보다는 '되게 만들기'에 집중한다. 사람들도 매우 중립적이다. 갈등을 최대한 피하고, 업무에 집중하는 편이다. 직장 동료에게 친절하지만 서로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제도적으로도 스위스는 글로벌 기업들에게 매력적이다. 높은 임금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확실하다.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고, 다른 EU 국가들보다 해고도 쉽다. 법인세도 낮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글쎄, 미국이나 싱가포르가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워라밸 따위 없냐고? 있다. 열심히 일한 대신 열심히 쉰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불편했던 것이 휴가 중에도 업무 전화를 받아야 했던 부분이다. 스위스에서는 휴가 간 사람한테 연락하면 전화한 사람이 잘못이다. 1년에 두 번 정도는 일주일 정도 길게 쉰다. 저녁 있는 삶? 있다. 아이가 있는 집들은 보통 아침 7시에 출근한다. 4시에 퇴근할 수 있으니까. 물론 아이를 재우고 야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와 저녁 식사는 함께 할 수 있지 않은가? 스위스에서 9시 맞춰 출근하면, 실제로 늦은 건 아니지만 이미 대부분의 직원들이 회사에 와 있기 때문에 늦었다고 여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는 내 취미 생활을 위해 일찍 출근하면 1분 1초가 아깝다. 주어진 업무를 얼른 끝내고 제 때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스위스 사람들은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을 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친절하지만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에 그 이상의 노력을 붓지 않는다. 5시 30분 이후 회의는 대표도 안 잡는다.
우리나라에서 7시 출근, 4시 퇴근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회사와 사람이 서울에 있기 때문인 듯싶다. 9시 출근이어도 대부분 직장인들은 6시에는 일어날 테다. 버스 한 대쯤은 그냥 보낼 각오를 하고, 한 시간 반 거리의 통근 길을 나서야 하니 말이다. 출퇴근에 두 시간을 쏟고 나면 회사에 도착해서, 집에 도착해서 지친다. 그래서 싱글들은 회사 옆 오피스텔을 구한다. 침대가 들어가면 마땅히 책상 놓을 자리도 없다. 창문을 열면 녹색은 없고 회색의 옆 건물이 보인다. 안타깝다. 우리나라 사람들 에너지도 넘치고, 일도 정말 잘하는데.
스위스를 보면 국가 균형 발전이 놀랍도록 잘 되어 있다. 물론 몇몇의 대도시가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서울과는 달리 큰 기업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고, 튼튼한 중소기업들이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다. 대기업이 본사를 옮긴다 하면, 어느 지역에 공장을 세운다 하면, 가장 먼저 뜨는 뉴스가 집값이다. 역시나 직접 민주주의가 떠오른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매일 출퇴근하는 이들, 30%가 넘는 서울의 1인 가구들에 물어보면 회사를 서울 밖으로 옮기는데 찬성할까, 반대할까. 1인 가구의 약 48.7%가 20~30대이다. 대부분 집값과 큰 상관없는 세입자일테다. 참,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울을 벗어나면 큰 일 나는 줄 안다고 들었다. 이미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된 삶을 살아와서 그런가 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숨통 트고 살아갈 만한 세상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