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 소요산에서 나는 윌리엄 수도사가 되었다

by 법의 풍경

2025년 6월 6일, 현충일.


이른 아침, 쓰고 있던 빅터 차의 음모론 분석 글을 마무리했다. 음모론을 해체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구조물을 해체하는 작업 같았다.


정치와 상징, 담론과 기호로 쌓아 올린

거대한 허상을 걷어내는 일.


너무 오래 앉아 분석하고, 읽고, 쓰다 보니 원기 충전이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과 감응하며 탈진한 기운을 되살릴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소요산.


나는 소요산을 좋아한다.

옛 시인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산.

그중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인물,

봉래 양사언이 거닐던 곳.


그가 걸었던 길을 상상하며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살아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봉래 형의 시는 내게 만트라다.



소요산은 말발굽 모양이라 여러 진입로가 있다.

사람들이 자주 가는 길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외진 샛길도 있다.


자주 오르다 보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도 일부 익히게 되었다. 그중 몇 곳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입구가 막히기도 한다.


그날은 조용히, 혼자 걷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인적이 드문 길,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한 길을 골라 올랐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퍼졌고,

길은 희미했지만,

지난해 쌓인 낙엽을 밟는 감각이 좋았다.

나는 그 길에서 혼잣말도 하고, 멈춰 눈을 감기도 하며

봉래 형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검은 배설물

2025. 6. 6. 오전 소요산에서 촬영한 똥,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흙이 살짝 팬 자리에 단단히 자리 잡은 덩어리 몇 개.

크기, 색, 광택, 수분 상태…

아무리 봐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베어 그릴스를 좋아했었는데,

한창 아이들과 캠핑 다니던 시절이 떠올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방금 싼 건 아니지만, 어제 것도 아닌 느낌.


가슴을 두근거리며 손을 코끝으로 가져갔고,

다행히 큰 악취는 없었다.

최소 몇 시간 전, 아마 새벽과 아침 사이?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직감했다.

살쾡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한국 숲의 최상위 포식자.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왜 그렇게 느꼈느냐고 묻는다면… 설명은 어렵다.

몸이 먼저 알아본 기호랄까.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한 직감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집에 와서 분석을 시작했다.

배설물의 형태, 내용물, 위치, 습성,

주변 동물과의 비교.

하나하나 대조하며 느꼈다.

이건 단순한 똥이 아니야.


그 일의 의미를 곱씹으며, 나는 깨달았다.


‘으음... 오늘, 나는 윌리엄 수도사가 되었구나.’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말의 이름을

추리로 맞추는 장면이 있다.

브루넬로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흔적 하나에서 존재를 추론하고,

이름을 만들어냈다.


윌리엄은 이름을 맞췄고,

나는 삵에게 ‘요린(遙麟)’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작명과정과 의미는 이 시리즈 말미에 설명할 예정입니다)



탐구를 정리하고,

사진을 확대해 비교하고,

탐구일지를 만들던 중—


어디선가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

고개를 드니, 배우자였다.

지금 뭐 해?
“…어… 똥… 분석 중이야.”
“지금 제정신이야…?”
“… 이건 정말 중요한 거야. 아마 변호사 중에
이런 기호학적 탐구 한 사람은 없을걸?”
“쫌… 제발 쓸모 있는 거 좀 해.
조용하다 싶으면 불안하다니까.…”
억눌린 그림자는 무섭게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아예 ‘소요산 탐구생활’ 시리즈를 시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소요산에 대한 보고서.

이야기의 옷을 입히고,
분석의 신을 신기고,
감응의 모자를 씌워서.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혹시 소요산에서 요린이를 본 분이 계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그 녀석은 지금도,

그 숲 어딘가를 조용히 걷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