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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겹치는 자들 — 삵과 너구리의 시간차 전투

by 법의 풍경

[EBS 다큐프라임〈생존〉]의 한 장면.

13분 12초부터 갈대숲에 한 마리 삵이 등장한다.

눈발 날리는 겨울, 새끼에서 막 독립한 어린 삵은 자신의 영역을 조용히 점검하며 돌아다닌다.

그러다 갑자기 너구리와 마주친다.


너구리는 커다란 덩치로 태연히 돌아다니고,

삵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둘 사이엔 직접적인 충돌도, 격렬한 사냥 경쟁도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흔적을 덧씌우며,

시간을 비껴 사용하며,

기호를 통해 조용히 밀고 당긴다.



1. 시간분화와 자원분할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이것은 우연한 마주침이 아니다.

생태학적으로 이는

시간 분화 혹은 자원 분할의 대표적 사례다.


서로 다른 생태적 지위를 가진 두 동물이,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지만 시간대와 기호를 달리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을 회피한다.


이는 고등 포식자들 사이에서 흔히 관찰되는

경쟁 회피 전략이다.

삵은 고양잇과로서 주로 야행성이고, 단독 생활을 한다.

영역에 대한 의식이 강하고,

자신의 존재를 냄새와 배설물로 표시한다.


반면 너구리는 잡식성 개과로, 활동 시간이 유연하고 사회적 성향을 띠며, 같은 장소에 분변장을 반복적으로 형성하는 습성을 보인다.


즉, 두 동물은 서식 방식, 먹이원, 생태적 틈새(niche) 면에서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이를 냄새와 시간의 언어로 조절해 가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조율한다.


용어 설명:

⏳ 시간 분화(Temporal Partitioning):
생태계에서 서로 유사한 자원을 사용하는 종들이 *활동 시간을 달리함으로써 직접 경쟁을 피하는 전략*. 삵과 너구리가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다른 시간대에 활동하는 것도 이 전략의 한 예.

*자원 분할(Resource Partitioning):
서로 유사한 생태적 틈새를 가진 종들이 *먹이 종류, 서식지, 활동 시간 등을 나눠 사용함으로써 공존하는 방식*.



2. 인덱스와 심벌로서의 똥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나는 그날 소요산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마주했다.


검은색의 단단한 배설물,

그 위에 얹힌 갈색의 부드러운 배설물.

삵과 너구리.


이건 단순한 배설이 아니라

냄새로 남긴 차례의 전투⚔️였다.

삵이 먼저 지나갔고,

너구리는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존재 위에 존재가 겹쳤고,
흔적 위에 흔적이 쌓였다.


이 현상은 기호학적 해석에서도 의미심장하다.

퍼스의 기호학에 따르면, 삵의 똥은 인덱스(index)다.

존재가 거기 있었음을 나타내는 직접적 흔적이다.

그 위에 너구리는 해석을 덧씌운다.

이것은 단순한 덮기가 아니라, 선언의 개입이다.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너구리는 그 흔적을 읽은 뒤,

자신의 흔적으로 생태적 응답을 보낸다.

그는 말없이 말한다.


나는 네 흔적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내 차례다.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퍼스의 기호 분류

* Index (지표적 기호): 직접적 흔적(예: 똥, 발자국)으로 존재를 가리키는 기호.

* Symbol (상징): 문화나 학습을 통해 해석되는 기호.

* Icon (도상): 외형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
여기서 배설물은 Index이지만, 위에 덧씌운 흔적은 해석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Symbol의 성격도 갖는다.



3. 똥을 통한 공존의 역학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생태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경계 동시성(edge synchrony)’으로 부르기도 한다.


포식자들이 영역이 겹치는 접경 지역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것을 피하고,

미묘한 시간 조절을 통해

충돌을 회피하는 생태적 전략이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기호의 조절을 통한 공존의 역학이다.

이처럼 배설물은 단지 생리적 산물이 아니라,

기후, 먹이, 스트레스, 서열, 시간대, 공간 점유 상태를 반영하는 총체적 생태 지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삵과 너구리의 흔적이 겹친다는 사실

우리가 보지 못한 그들의

묵시적 협상과 경계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준다.



4. 정리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삵은 있었다. 너구리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서로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이 사실은 단순한 자연 관찰이 아니라,

기호의 생태적 충돌이자 조화였다.


기호는 냄새로, 리듬은 발자국으로,

그리고 모든 선언은

똥 위에 똥으로 쓰인다.


우리는 그 흔적을 읽는 순간,

비로소 생명의 언어를 듣는 것이다.

© 설운(設韵).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인덱스, 아이콘, 심벌 설명>


1. 인덱스 (Index)


정의: 기호가 그 대상과 물리적·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 “이 흔적이 있다는 것은,

거기 무엇인가 있었다는 뜻이다.”


소요산 사례:

삵의 배설물: 삵이 직접 남긴 흔적으로,

삵이 그 장소에 존재했음을 지시하는 기호.


발자국: 누가 걸어갔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실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직접적 인과 관계를 갖는다.


이슬 맺힌 풀숲의 눌린 자국: 그곳에 누군가 몸을 뉘었음을 나타내는 시간적 인덱스



2. 아이콘 (Icon)


정의: 기호가 대상과 형태나 성질이 유사한 것.

→ “이건 그걸 닮았기 때문에 의미를 전달한다.”


소요산 사례:

삵 안내판의 그림: 그림은 삵의 실제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에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동그랗게 겹쳐진 배설물 그림: 실제 배설 형태를 묘사한 스케치는, 관찰자가 실제 대상을 상상할 수 있게 함.


무인카메라에 찍힌 실루엣: 실제 동물과 시각적으로 닮은 형태가 아이콘 기능을 수행함



3. 심벌 (Symbol)


정의: 기호와 대상 사이에 자연적 연결이 없고,

사회적 규약이나 학습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

→ “이건 우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그걸 의미한다.”


소요산 사례:

“소요산은 야생동물보호구역이다”라는 표지판:

‘야생동물보호구역’이라는 단어 자체는

약속된 의미 체계로서, 아무 자연적 연관이 없음.


“소요산에 삵이 산다”는 말:

‘삵’이라는 단어는 그 동물의 실제 모습과 아무런 유사성 없이, 단지 문화적으로 학습된 코드일 뿐.


생태 리포트에 사용된 ‘멸종위기 Ⅱ급’이라는 표현:

법적·행정적으로 부여된 상징체계,

학습 없이는 그 등급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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