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관찰과 가설설정(Hypogene)
살쾡이다.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그건 오래된 기억이나 감상이 아니라, 진짜 촉이었다.
하지만 이 직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가설을 세우고, 하나하나 검증해야 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손에 남은 촉촉했던 똥의 촉감을 붙잡고 분석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건 퍼스의 귀추법(abduction) 구조였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찾기 위해,
가장 간결하고 우선적인 가설을 세운다.”
배설물은 2개의 뚜렷이 구분되는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로 연속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거의 검은색, 광택이 있으며 단단한 질감
다른 하나는 짙은 갈색으로 다소 부드럽고, 씨앗이 다량 포함
형태는 짧고 굵은 원통형,
길이 약 5~9cm, 지름 1.52cm 내외.
표면은 일부 굳어 있었지만,
중심부는 미지근하고 습기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
즉, 배설 시점은 그날 새벽 5시 40분에서 7시 사이,
내가 지나간 직전 몇 시간 이내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한쪽 배설물 표면에 ‘수박씨처럼 생긴 밝은 씨앗’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일반적인 산딸기나
야생 열매류에서 나올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 씨앗들은 납작하고 크며, 밝은 노란색,
수박씨와 거의 유사한 구조를 보였다.
수박은 이 지역에서 자생하는 열매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소요산 인근에는 농가도 있고,
수박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밭도 있다.
그렇다면 이 배설물의 주인은
농가 주변까지 접근하여 수박을 섭취한 뒤,
소요산으로 들어와 배설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많지 않다.
수박을 먹고, 숲으로 돌아와, 이 정도 크기와 형태의 배설물을 단독으로 남기는 동물.
바로 여기서 수사범위가 좁아진다.
용의자 1: 너구리
잡식성 / 야간활동 / 농가 습격 잦음
수박·과일·음식물 쓰레기 모두 섭취 가능
단점: 보통은 분변장을 형성하며, 여러 마리가 반복적으로 같은 자리에 똥을 싸기 때문에 흔적이 뭉침
또 냄새가 매우 강하고, 섬유질이 많아 질감이 훨씬 부드럽고 퍼짐
용의자 2: 삵 (살쾡이)
육식성 기반이나 기회성 잡식 행동 있음
인근 마을/농가에서 닭·과일 등을 먹는 사례 보고됨
단독 생활, 배설물도 1~2개 덩어리로 깔끔하게 남김
배설 위치가 일정하지 않고, 깊은 산중이나 오솔길 한가운데도 있음
배설물을 묻지 않음, 그대로 노출
그런데 이번 현장의 배설물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개체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냄새가 거의 없고, 색이 짙고 단정하며, 씨앗이 거의 없는 형태 → 삵일 가능성
다른 하나는 더 부드럽고 밝은 색, 씨앗이 다량 포함되고 섬유질이 많음 → 너구리일 가능성
표면 윤기, 배설 위치, 주변 흔적 없음 등도
모두 삵 특유의 ‘지나가는 배설’과 부합했다.
반면 다른 덩어리는 너구리가 흔히 사용하는
분변장 스타일과 거리가 있었지만,
기회성 먹이 섭취와 흔적 남기기라는 측면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이번 사건은 단 한 마리의 흔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생명이 한 지점에 남긴
교차 흔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중 하나는 삵의 흔적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른 하나는 너구리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똥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이 장소는 왜 그들에게 흔적을 남길 만큼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소요산이라는 장소가
이 두 종 모두에게 생존 가능한 공간인가?
삵이 정말 이 산을 생활 반경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
그건 더 이상 ‘한 마리의 똥’이 아니라,
두 마리의 기호가 포개진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