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이후 인생의 많은 부분을 대단한(?)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외형을 추구하고자 노력했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야만 내 인생이 남다른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이 될 거라는 착각으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동안은 새롭게 주어진 신사업 프로젝트를 맡으면 내가 뭐라고 된 냥 신이 났고, 기획을 통과시키고 큰돈을 쓰는 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나는 꽤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곤 사업을 추진토록 결재한 윗분들이 회사를 떠나고 더 이상 그 사업이 그 부서의 주력사업이 되지 않으면 '그래 역시 조직은 한계가 있어'라고 생각하며 뜨거운 마음이 금세 식어 버렸다.
그래서 유연하다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일을 하면 더 많은 성취감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운 좋게 시리즈 A 스타트업에 이직하여 시리즈 B단계로 키우는 과정에 전력을 다했다. 해당 기간 동안 꽤 많은 신사업을 시도해 론칭하였고, 받은 투자액이 400억이 넘어섰다. 투자자 그리고 동료 C-레벨과 자축하며 비싼 와인과 샴페인을 마시는 동안 내 인생이 성공을 향해 가는 거라 생각했다. 무엇인가 찜찜한 마음을 한편에 묻어 둔 채로.
돌고 돌아 지금은 누가 보기엔 한량, 백수가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주육아빠(전업주부+육아+아빠)를 주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 시간이 의미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시간을 통해 경제적 부를 쌓았고, 커리어라는 것을 획득했으며 사회의 친구들이 생겼다. 현대사회에서 꽤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행복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의 나는 동의하진 않는다.
지난 이야기에서 전한 것과 같이 느지막이 말문이 트인 다섯 살 딸은 종종 내게 뼈 때리는 교훈을 준다. 마치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는 것처럼.
아이는 언제나 지금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내일은 없다. 아빠가 내일을 운운하는 순간 지금의 행복을 강렬하게 원한다. 그 행복한 행위에 대해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스무 살 성인이 되면서 늘어나는 것은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경쟁심을 느끼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였다. 육아를 하면서 조금 달라진 것은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음식, 사람, 듣고 있는 음악, 풍경, 운동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느끼고 공감하려 한다. 그러는 동안 좀 더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표현이 더 맞아 보인다. 그게 행복감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아이는 작은 것에도 늘 감사하다. 하원하기 전 주머니에 꼭 챙기는 것이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비타민, 사탕 같은 것이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그네를 태워주다가 슬그머니 사탕을 하나 꺼내어 보여 주면 '우와'라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리고 입에 쏙 하고 넣어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가끔 '행복해'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며 작은 기쁨에는 인색해진 나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SNS나 미디어를 통해 비싼 물건을 소유하게 되면 행복하다는 가짜 감정을 주입받는다. 고작 그런 일들로 행복을 추구하다 보니 계절이나 일상의 변화 등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에는 무뎌져 버렸다. 요즘 아이가 등원하는 길에 뛰어가는 아이를 찍으며 매일 아침 작은 행복을 느낀다. 사진 속엔 7월의 푸르름이 담겨있고, 쑥쑥 커가는 아이의 씩씩한 뒷모습이 나를 웃게 만든다.
아이는 누가 되었든 편견 없이 바라보고 다가간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발달이 다소 느린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의사소통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어려워서인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체격이 또래보다 컸던 아이는 점점 원내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그 아이와 놀다 다친 아이가 하나 둘 생겨나자 어린이집에 많은 컴플레인이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딸 역시 그 아이로 인해 입 주위가 부어오를 만큼 다친 적이 있었다. 처음엔 속상했지만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놀이터에서 만났다. 물총을 들고 해맑게 형들을 쫓아다니는모습이었다. 딸은 그 아이 때문에 다친 것도 잊은 듯 보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행여나 함께 놀다 또 다칠까 봐 막아서려 했는데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애들끼리 놀다 다친 것뿐이야.오버스러운 아빠야..'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장벽을 한쪽에서 깨고 들어오려 할 때 불쾌감을 느끼고 상대를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딸아이가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아이의 천진난만한 마음이 내게도 남아 있다면 나 또한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