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호 수신거부

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고작 몇 개월 일찍 태어났다고 '청년' 특권을 박탈하는 것도 모자라 하품 나오는 책이나 보라는 세상에 또 한번 빅 엿을 날려야겠다. 범생이로 살아도 억척스럽지 못하면 쓸모없이 나이만 먹는데, 나이를 먹으면 그래서 더 쓸모가 없게 된다.


경력이 단절된 '중년' 여성을 위한 혜택을 받으려면 고용보험에 가입한 상태로 임신 및 출산을 하고 퇴직한 상태여야 할 것이다. 그녀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사람의 관점에서 아이가 없는 경력 단절 여성은 그냥 게으른 여성이겠지.




열심히 선을 보러 다니는 것도 아닌 중년 싱글 여성이 성실하게 돈을 벌지도 않으면 잉여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먹을 것이 없어도 동굴로 들어가게 만드는 시선이다. 성실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학력 실업자에게도 소셜 프레스의 영향이 미친다. 때로는 더 강하게 미친다. 도박이라도 하라는 건가. 계급장 떼고 육체노동을 하는 데도 한계가 왔는데 최저시급도 안되는 정신노동을 하라는 건가.


이직의 신도 이직 한도가 있었다. 청년기에 일인다역을 했다면 남들보다 30년쯤 빠르게 대상포진이 찾아올 수도 있다. 부디 겪기 전에, 아니 겪고 조심해라. 대상포진을 겪은 몸은 기존 직장에서 버티지 않는 한 재취업이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도 팬데믹 기간이라면 더더욱.


내 인생은 망할 뻔 했다.




누가 독촉할지 몰라서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 아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없다. 일과 관련된 극소수의 사람들, 이미 만나기로 약속했거나 동행하다 잠깐 흩어진 친구 뿐이다.


그 외에는 없다.


발신자 표시제한을 차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모르는 번호는 모르는 번호니까 안 받는다 해도, 발신자 표시제한은 아는 번호다.


아는데 내가 차단해서 발신자 표시를 끄고 거는 번호다. 익명호 수신거부라는 기능이 당연히 있지 않겠냐는 발상을 하는데 5년이나 걸렸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하나씩 성취한 5년이었다. 내 능력만으로 독촉을 받으면서도 여행을 가고 (그게 능력인지는 나중에 따지자. 물론 난 따질 생각이 없다.) 여행 계획을 시작으로 사진에세이를 게시하고 영어공부 기록으로 온라인 세계를 유영하고 그 모든 작은 시도가 모여서 어떤 브랜드가 됐다. 거의 모든 것이 됐다. 거의 모든 것을 읽고, 쓴다.


팬데믹 첫 해에 영어 공부를 12시간까지 해봤다. 야간자율학습을 딱 7개월만 하고 수능 1등급을 받으려면 단기간에 최고 집중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공부하기 전, 내내 운동을 해서 최상의 컨디션이었던 그 소녀는 돌아오지 못했다. 야자 7개월은커녕 정규직 7주도 불가능한 조기 대상포진 환자에게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대충 했다. 모든 것을 대충 했다.


책은 대충 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영어 자신감 덕분에 거침이 없었다. 어려워서 읽기 싫은 책에 대한 정직한 기대평은 어렵게 써서, 즉 잘못 써서 읽기 싫은 책이다. 물론 내가 안 읽었다고 읽기 싫은 건 당연히 아니다. 존재를 모르거나, 아껴 읽느라 책장에 묵히고 있는 책이 훨씬 많다.


존재를 모르는 책을 가급적 줄여보려고 수시로 책소개책을 스캔한다. 난 이제 휴식으로 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모든 책을 읽는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고, 좋아해볼 의향이 있는 작가가 있고, 이들만으로도 위시리스트에 1000권 가까이 있고 소장한 책은 셀 수 없어서 세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받지 않을 전화를 안 오게 하는 방법 따위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전화가 오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많았다. 독서마저도 힘에 겨워 휴대폰을 들고 누워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럴때 전화가 오면 바로 뮤트를 해서 금방 잊어버렸다.


내게 끊임없이 전화하는 사람이 있다는 지속되는 사실도 금방 잊어버렸다.


그 얘기를 하면 번호를 바꾸라는 사람도 있다. 내가 왜 번호를 바꿔야 하냐고 물으면 답을 못한다.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 그런 말도 안되는 조언을 하는 사람도 익명호 수신거부를 몰랐다.


아무래도 젊은 친구를 좀 사귀어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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