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12. 2024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강유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일이 똑 떨어지는 어떤 '직업'이나 '직종'이나 '업종'이었던 적이 없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분류법에 끼워넣기 싫은 마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벌집* 이야기를 누가 했더라?)


날이 갈수록,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정체성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자부심도 있다. 예를 들면 서울 태생. 새삼 서울에 환장하는 요즘 시대에는 서울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거의 생존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것만으로도 존경(?) 받을 수 있다. 그마저도 부모 세대의 비자발적(?) 상경에 의해 가능했다. 별 수 있나. 다들 그렇지 않나.


어차피 시대나 세대는 의미 없다. 사람들이 젊은 여성을 스캔하고 분류해 넣는 범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젊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관건인데 젊은 여성이라는 스펙트럼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려면 마음의 그릇을 키워야 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야 한다. 내가 시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한 상태에서 담담하게 세월을 비껴가고 있는 언니와 너무도 젊은 동생을 품을 수는 없다.


성립할 수 없는 질투,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라이벌 의식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친구라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남몰래 컴플렉스를 간직하다가 강유를 할큄으로써 본색을 드러냈다. 아프지만 무브 온을 해야 한다. 때리기 싫다고 계속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멀어지고, 더 성장하고, 정상에 그들이 없음을 확인하면 된다.




강유는 10년 전에 회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표면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데 약 2년이 걸렸다. (젊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마침내 회사의 규율을 몸에 익히자마자 퇴사했고, 자기 피부에 맞는 천연 화장품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눈에 띄게, 그다음에는 소문내지 않고 창업을 했다.


복선은 재능을 믿고 설치다가 끈기를 잃어서 손절한 종목이 많다. 시간이 가고 노년이 다가올수록(기대 수명을 생각하면 아직 중년에도 진입하지 못했지만, 구시대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자기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마저도 진짜 버닝을 하다가 버닝맨이 되는 수가 있다. 적당히 달려야 한다. 마라톤을 하듯이.


애초에 단거리를 가장 못하고 단거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훨씬 잘했던 복선이 최근까지도 단기 승부를 내려고 했던 것은 삼십 대 특유의 치기다. 늦었지만 따라잡을 수 있어!


진실의 방에 도착했다. 안 늦었고, 따라잡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게 김연아라면.


누가 보면 운동선수인 줄.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진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복선의 무대 욕구는 사진으로도 남아있고, 기나긴 공연 경력이 증명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꿈을 포기한 뒤에야 좀 더 편하게 자백할 수 있었다.  




"작년, 아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액션 배우가 되고 싶었어."


복선의 고백은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마침내 그들은 아담한 한옥 빙수 카페를 찾아냈다. 당분간 새로운 아지트가 될 것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팥빙수에 아이스크림, 적당히 모던하면서 고상한 한옥 인테리어와 믹스매치한 추상화는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켰다.


"나는 공연장을 설계하고 싶었지. 그게 디자인 욕구인지 무대 욕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강유는 혼잣말을 하듯, 먼 산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모두 조금은 솔직하지 못한 욕망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미드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야. 그런데 막상 영어로 책을 읽을 정도가 되니까 연기에 대한 무능과 거리감이 확실해진 거지."

"맞아. 나도 무대 위의 짜릿한 순간을 좋아하는데 그 잠깐을 위해 준비하고 긴장하는 게 점점 벅차더라고."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이 편하고, 굳이 제작을 해야겠다면 원작?"

"그래서 우성이는 리뷰하는 거 아닐까."


우성은 15분쯤 늦겠다고 미리 연락했는데 20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강유는 우성이 없는 자리에서 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없는 우성이라도 빼놓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아, 언니! 왜 이제 와."

"버스 잘못 탔어. 급하게 마감하느라고."


때마침 우성이 도착하자 평소와 다르게 복선이 더 반가워했다.  


"다음에는 브로드웨이에서 인형탈 알바나 공주 알바라도 해야겠어."


복선은 그보다는 그 장면이 드라마에 박제되어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를 전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보다 솔직한 욕망이지만 막상 자백할 때마다 재차 확인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을까?   


"야, 인형탈 쓴 모습은 뉴스에 나와도 아무도 못 알아봐."


복선의 속마음을 읽은 듯, 우성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대화의 중심으로 합류했다. 강유는 명상에서 깨어나 우성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빙수랑 커피 더 시켜서 본격적으로 알려주시죠."   



(계속)



*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시몬 드 보부아르의 입양 딸)의 <둘도 없는 사이> 서문에 등장한다. ‘자자는 특별했고-벌집 구멍 중 하나가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미 만들어진 거푸집 안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불길한 용어인-"상황에 적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백수린 옮김, <둘도 없는 사이>, RHK, 2024




이전 02화 고립된 자들의 자기만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