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야경, 그리고 인생 맛집
사실 부다페스트는 '어떻게 여행하세요'라는 정보를 주기보단, 그냥 그 도시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다. 발바닥에 땀나게 관광지를 찾아다녀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느껴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프라하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갔다. 22살 배낭여행자 시절에도 독일에서 프라하로 넘어오는 야간열차를 탔었다. 돈이 없어서 4인실 쿠셋을 예약했고, 새벽 1시에 배정된 방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낯선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었고, 그래서 캐리어를 안전하게 묶어놓을 새도 없이 2층으로 기어올라가 몸을 눕혔던 기억이 난다.
이번엔 제일 비싼 디럭스룸으로 예약했다. 친구와 단둘이 쓸 수 있고 샤워실도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은 곳에서 잘 수 있는 자유. 성공했다 이 정도면.
날씨가 정말 끝내주게 좋았던 3박 4일. 딱 비행기 타러 가는 날 아침에만 비가 왔다. 운도 좋지. 눈부셨던 다뉴브강과 세체니 다리. 다들 부다페스트 하면 야경만 이야기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낮이 더 좋았다. 가을바람 아래 다뉴브강은 천국의 모습.
아픈 기억을 간직한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아기 신발이 있다. 마음이 찌릿하다. 누가 이들에게 옷과 신발을 벗게 했나. 이 강가가 온통 피로 물들 때까지.
역시 부다페스트는 야경이다. 야경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어부의 요새에 올라가면 저 멀리 보이는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너무 예쁜 트램. 귀여워라.
일요일 아침엔 마차슈 성당에 가서 미사도 봤다. 헝가리어를 하나도 못 알아 들었지만 성가대의 음색만으로도 성스럽던 시간. 옆에 앉은 사람의 평화를 빌어주는 순서에서 내 손을 잡고 나지막이 'Peace'를 속삭여주던 아주머니의 촉감이 기억난다.
언뜻 보기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덜 화려해도,
구석구석 부다만의 감성을 가진 골목과 거리들이 있다.
다들 간다는 그레이트 마켓홀에서 기념품도 사고,
길 가다 넘나 내 감성인 샵을 만나 2019 다이어리도 사본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에 가기 전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갔던 가게가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주인장이 저 나무 벽장 속에서 나에게 마법 지팡이를 꺼내 줄 것 같은 그런 신비로운 곳. 너무 조용하고 조심스러워서 종이 한 장 넘기는 소리도 크게 들리는, 내일 또 가고 싶은 보물 같은 곳이다.
인생 버거를 만났다.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지금, 몹시 괴롭다. 점심에 하나 먹고 저녁에 하나 먹고, 무리하면 그다음 날 점심으로도 또 하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버거. 사이드로 나오는 고구마튀김도 예술. 가게 이름은 Meatology Budapest, 사진 속 버거는 베이컨치즈버거.
헝가리에 왔으니 헝가리 음식을 먹어야지. 헝가리쿰 비스트로에 가려고 했으나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없어서 찾아간 이곳. 서비스도 음식 맛도 만족스러웠다. 식전 빵도 나오는 나름 고급 레스토랑이다.
각자 헝가리 전통 디쉬를 하나씩 시키고 '그래도 굴라쉬를 먹어봐야지'해서 하나만 주문하니 센스 있게 두 개의 냄비에 나눠서 줬다. 프라하에서 먹었던 걸쭉한 굴라쉬와는 다르게 똠양꿍과 순한 육개장이 생각나는 맛. 너무 맛있어서 그야말로 마셔버림.
그리고 더 맛있었던 비프스튜. 장조림보다 연한 고기에 짭조름한 스튜 간이 잘 배어있고 동글동글 작은 감자도 부드러웠다. 친구가 시킨 치킨 요리도 큼지막한 닭다리에, 고기 모자랄세라 가슴살 한 덩이까지 얹어 푸짐했다. 전통식 누들과 사우어크림을 얹어먹는다. 크 역시 동유럽은 음식이 최고란 말이야. 가게 이름은 Budapest Bistro.
인생 피자 나가신다. 역시 Comme Chez Soi를 가려고 했으나 늦은 예약으로 실패하여 가게 된 이곳. 다시 부다페스트 간다면 꼬모 말고 여길 갈 거다. 저 도우의 얇기를 보라.
이 피자로 말할 것 같으면 도우와 소스, 각종 토핑을 내가 선택해 만들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피자다. 우리는 비비큐 소스를 바르고 토핑을 버섯, 살라미, 올리브 등 7개나 올렸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느껴지는 쫄깃한 도우 위 늑진한 치즈 기름과 짭짤한 소스, 그리고 일곱 가지의 식감. 예술이다. 그래 이런 게 예술이지. 나는 서울 안 가고 이 피자집 아들이랑 결혼하련다.
퀄리티가 이 정돈데 음료까지 둘이서 1만원 중반대에 먹었다는 사실. 하, 광화문에 하나 있으면 이틀에 한 번씩 갈 텐데ㅠㅠ 가게 이름은 Local Korner Pizzéria.
길거리 음식도 먹어줘야지. 이건 헝가리의 전통 피자 '랑고스(langos)'라는건데 딱히 맛집이 있다기보다 여러군데서 파는 것 같다. 튀긴 반죽 위에 사우어크림과 짭잘한 치즈를 잔뜩 올려 먹는다. 토핑은 고를 수 있다. 반죽이 굉장히 쫄깃하고 중독성 있는데 씹다보니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이다. 한국인들 블로그 후기에는 호떡이라고 했는데 '음... 그게 정확히는 아닌데...'라며 친구랑 머리를 굴려보니, 그래! 그 맛이다. 꽈배기에 설탕 안 묻힌 맛!
한국인들 입맛에는 약간 느끼할 수도 있다. 치즈와 사우어크림의 조합이 도전하기 어렵다면 달달한 누텔라나 잼을 바른 걸 먹어도 좋겠다. 역시 꽈배기에는 설탕이니까?
카페 투어를 빼놓을 수 없다. 프라하처럼 커피의 맛, 분위기, 친절도 3박자를 모두 갖춰 '퍼펙하다!'라고 외칠만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꽤 괜찮았던 곳. 잠시 동행과 떨어져 혼자 노트북을 하거나 메모를 하거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홀로 사색을 즐기는 저 여성분처럼. 플랫화이트가 맛있었던 이 가게 이름은 espresso embassy.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카페로 가장 평점이 높았던 곳은 아마도 여기였다.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고 꽤 힙한 음악들도 많이 나와서 좋았지만, 자리들이 너무 오픈되어 있달까. 멍 때리고 앉아 있기에는 조금 눈치보이는 카페다. 가게 이름은 9Bar.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내가 오랜만에 '처음 가본 유럽 도시'였다. 22살 배낭여행 이후로 네번을 더 유럽을 찾았지만, 좋았던 곳을 다시 찾게 되거나 나는 갔지만 동행은 못 가본 곳을 가게 되거나 했었다.
그래서 3박 4일의 부다페스트는 여행이 무뎌진 나에게 오랜만에 '설렘'을 안겨준 곳이다. 햇살이 아까워 숙소에서 혼자 나와 골목 구석구석의 사진을 찍을 때, 다뉴브강이 머금은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때, 언덕 위 낯선 성당 낯선 말들 속에서 오로지 혼자 기도를 드릴 때, '이방인이 되는 이 느낌은 언제나 날 뜨겁게 만드는구나' 다시 한번 느꼈더랬다.
다음의 설렘은 어디가 될까?
내년에도 유럽 땅을 또 밟게 될 것 같다.
다른 유럽 여행기는 아래에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