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던 청춘 10년의 회고록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나는 드디어 서른이 된다.
힘든 20대였다. 고된 입시 후에 입학한 대학은 낯설었다. 또 다른 차원의 경쟁은 나를 새로운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 이제 막 입성한 사회의 냉혹한 현실은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이 큰 무기가 되는 전쟁터였다. 어떤 친구들은 엄청난 집안의 부잣집 딸이었고, 어떤 친구들은 어렸을 때 외국에 살다 와서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했고, 어떤 친구들은 특목고를 나와 그들의 커뮤니티를 이뤘으며, 어떤 친구들은 동아리를 휘젓고 다니는 핵인싸였고, 어떤 친구들은 전공과 교양 모두에서 학점이 끝내줘 교수님의 총애를 받았다. 다방면에서 무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동기들에 비해 나는 항상 초라했다. 물론 남들은 몰랐다. 나 혼자 초라하게 느꼈다. 하지만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무엇이든 나 스스로가 자신이 없었다는 게 중요했다.
겨우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장은 꽤 큰 증권사 홍보실에 정규직 전환 인턴이었다. 여의도로 폼나게 출퇴근할 수 있었지만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술접대가 아니었다. 보도자료 하나 제대로 쓸 줄 아는 선배가 없는 조직에서 나는 배울 게 없었다. 대기업의 타이틀과 높은 연봉보다는 나 자신의 전문성을 키워줄 곳이 필요했다. 몇 년 대충 일하다 시집가서 '이대 나온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교수님은 나를 홍보대행사로 보내셨다. 딱 2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일하라고. 대행사는 빡셌지만 일은 괜찮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행사에서 힘들었던 건 사람이었다. 누가 어디에 살고 누구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로 사람을 하대하고 뒷담화를 일삼는 천박한 시니어들 사이에서 나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사회란 이런 것인가. 선한 영향력이란 없는 것인가. 이렇게 더러운 세상을 살아야 하나. 내가 누구보다 일을 잘했기에 대놓고 건드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 안다. 지극히 일반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내가 청담동 출신의 그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좋은 안주 거리였는지를.
살아남는 방법은 나 스스로 끝장나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일머리가 있고 손이 빠르니 무조건 능력으로 승부해야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회사를 옮겼다. 대행사에서 스타트업으로, 스타트업에서 지금의 회사로 두 번의 스카웃을 받았다. 그때마다 연봉도 높였다. 자신감은 있었기에 좋은 대우를 요구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대행사 이후 약 3년을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사원에서 매니저로, 매니저에서 대리로, 대리에서 과장으로, 그리고 지금 7명의 팀을 이끄는 어린 팀장이 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지난 5년 정말 고생했다고. 사회가 알아주는 명함을 가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기준은 나 스스로에게 있다. 나에게는 내 발로 차곡차곡 올라온 이 자리에 대한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일에서만큼은 누가 뭐래도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 스펙타클했던 5년의 커리어패스는 나에게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 스스로에게 초라했던 나에게 생긴 무기는 '일'이었다. 30대가 기대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내가 새롭게 만들어갈 나의 커리어 때문이다.
이렇게 일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스물아홉. '나의 아홉수는 순탄하게 지나가네'라고 느꼈던 11월, 인생 최대의 시련이 찾아왔다. 7년 사귄 남자친구가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했다. 6개월째 롱디였지만 결혼을 약속했기에 찰나의 의심도 없었던 사이. 하루아침에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지 오래됐다는 칼날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고, 그의 곁엔 이미 독일의 삶을 함께 할 여자가 있었다.
헤어지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맞는 이별이었고, 그래서 죽을 듯이 아파했고, 그만큼 엄청나게 성장했다. 단순한 연애의 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전환점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산다. 이렇게 인생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충격파를 만났을 때 비로소 보게 된다. 무엇이 진짜인지를.
나는 알을 깨고 나왔다. 극도의 슬픔이 지나니 객관적으로 상황과 나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됐고, 지난 연애가 별로 행복하지 않았음을, 사실 내가 만나고 싶은 남자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음을, 서른 살의 내가 살고 싶은 삶은 결혼을 필두로 하는 안정이 아니라 보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날들이었음을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이 밉지도 원망스럽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 남이 된 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다. 여자 인생은 서른부터가 진짜라던 선배의 말이 이제야 와닿는다. 외모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일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나는 그 어느때보다 아름답다. 지금.
내년에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지만, 그 산더미가 날 힘나게 한다(난 워커홀릭이니까). 일을 해서 버는 돈과 적당한 소비는 내가 진짜 어른이 됐음을 느끼게 하는 바로미터다. 연애는 끝났고 새로운 남자'들'을 만나보고 있다. 오랜만에 즐겨보는 짜릿한 설렘이 꽤 큰 활력소다(솔로의 특권을 누리겠다). 소중한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또 엄청난 스토리를 만들며 서로를 지지해주고 있고, 신의 은총으로 가족들도 모두 건강하며 엄마의 일도 잘되고 있다. 아직까진 몸도 날씬하고 외모도 봐줄만한 것 같다(?). 특히 요즘 피부가 좋아져서 기분이 좋다. 내면의 자신감이 외면의 빛으로 발산되기를 바라는 중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목표들이 생겼다. 1) 2019년에는 독립을 하려고 한다. 이제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서기를 해야겠다. 엄마 품이 편하긴 해도 30년 살았으면 이제 내가 가꿔갈 내 공간도 필요한 것 같다. 2) 주차장에서 썩어가고 있는 차를 굴려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보려 한다. 기동력을 갖춰야 더 자유롭고 자주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3) 올해 휴가는 뉴욕이다. 서른 살이 되면 함께 뉴욕에 가자고 다짐했던 스무 살 꼬맹이들이 진짜 비행기표를 알아보며 느끼는 벅차오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까. 4) 얼마 전부터 시작한 영어 스피킹 과외를 꾸준히 할 생각이다. 지금의 자리에서 업그레이드되려면 자유로운 회화가 필수다. 더 이상 영어로 쩔쩔매는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 5) 서른 살을 기념해 사진을 남겨보려고 한다. 거창하게는 바디 프로필을 찍고 싶지만 맘먹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몸을 가린 프로필이라도. 포토그래퍼를 물색 중이다.
기대된다.
나의 찬란한 30대-
제 20대 중요한 순간을 함께했던 글들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