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마주치는 선명한 순간들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날의 공기와 냄새가 모두 손에 닿을 듯 생생한, 아주 특별한 순간들. 첫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됐던 주말 아침이 바로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회사 건강검진을 받던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해봤다. 예상했던대로 한 줄이 나왔다.
'그래,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는다더라.'
결혼한지 고작 보름 남짓 흘렀으니 두 줄이 나오는게 더 놀랄 노릇이긴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예정된 생리가 없어 또 한 번 혹시나 하며 테스트기를 꺼내든 토요일 아침 선명한 두줄을 만난 것이다.
주말 아침의 나른함이 몽땅 달아났다. 부랴부랴 남편과 달려간 동네에서 가장 큰 산부인과의 간호사는 내 손에 산모수첩을 꼭 쥐어주며 출산 예정일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임신이 실감도 나지 않는데 출산 예정일이라니. 내 인생에서 가장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진 듯해 뒷목이 살짝 싸해지기도 했다.동시에 가슴 구석 깊은 곳에서 말랑거리는 감정이 만져졌다.
우리가 엄마 아빠가 된다니.
그 주말 남편과 나는 내내 첫 아이에 대해 종알거렸고,월요일아침까지도 들뜬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예비 아빠는 출근하자마자 허니문베이비를 자랑했다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침 내내 축하를 받았다는 그의 행복이 내게도 전염되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나도 회사에 임신했다고 말해야 되는거지
이상하게도 회사에 임신를 말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았다. 입이 참 안떨어졌다. 생각이 쌓일수록 행동에 옮기기란 점점 더 어려워져 나는 적당한 기회를 엿보느라 쩔쩔 매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안타깝게도 임신을 알릴만한 적절한 타이밍 같은 건 없었다. 결국 임신 두달 째에 접어들어서야 퇴근하는 팀장의 뒷통수에 대고 "팀장, 저 사실 임신 했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던 와중에도 난감해하던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그럼 참 출산휴가 가야하는 거잖아
40대 후반의 딩크족인 팀장이 나의 임신에 뛸듯이 기뻐하리라고는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가 출산휴가로 인한 공백부터 언급하는 것이 그리 서운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 순간엔 끙끙 앓으며 묵히던 과제를 해결한 기분에 속이 시원할 밖이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서야 '아니, 예의상 축하한단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란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남편은 아침부터 축하세례를 받았다는데 나는 어딘지 불편한 표정과 명백히 언짢아하는 말투를 마주했다.
내 인생의 기록할만한 축복이 이곳에선 민폐일 뿐이라는 현실의 차가운 단면이 훅 가슴에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