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 어떤 인류학자 한 사람이 남태평양의 한 섬에 들어가서 연구를 하고 쓴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그와 그의 부인의 보금자리였던 조그만 움막의 앞집에 살던 작은 꼬마와의 일화가 하나 등장한다. 꼬마는 아침마다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을 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소중히 가지고 와서 그 인류학자의 손에 가만히 놓아주고는 했단다. 그는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을 거라고 썼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의 심정에 공감했다. 쉽게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그 느낌을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로맨티시즘은 버려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 나은 인류학자가 되려면 이런 '감상 따위'는 거부해야 한다는 오만함을 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이로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로 치면 가락시장 정도 되려나. 어떤 청과도매시장에서 학생들과 청소봉사를 했던 날이었다. 중국인 같은 애가 와서 매상은 올려주지 않고 청소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늘 그렇듯이 칭총 칭총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시장은 1시에 문을 닫고 2시나 3시가 되면 장사꾼들과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비었다. 거의 4시가 되어서 청소를 마무리하고 녹초가 되어 쉴 수 있었는데, 20대 초반의 젊고 팔팔한 대학생 청년들의 육체노동을 따라가느라 뱁새 가랑이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걸 대체 왜 한다고 했더라?'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썩은 채소와 과일의 흔적이 남은 손을 씻고 옷을 털고 있던 그때였다. 어느 순간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계시던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뭔가를 손에 쥐고 내게 다가오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가족도 일도 없고 말도 잘 하지 못하면서 그저 시장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시는 이 할아버지는 지금의 시장사람들이 기억을 할 수 없는 아주 옛날부터 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살아오시는 분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바로 앞에 오셔서야 손에 쥐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는데, 그건 세 개의 오렌지였다 (이곳의 오렌지는 한국에서 흔히 보는 오렌지와는 색깔이 좀 다르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마치 전부터 나를 알고 계셨던 어르신인 듯이 내게 오렌지를 쥐어 주고 가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같이 있던 시장 관리자 아저씨는 큰 소리로 웃으시며 "노인네, 청소는 다른애들도 다 같이 했는데 왜 얘한테만 주고 가는 거야"라며 농을 건네셨고, 함께 있던 대학생들도 모두 크게 웃었다.
사실 내가 그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시장통에 올때마다 마주치면서 악수도 나누었고 언젠가 만다지(Mandazi; 튀긴 빵의 일종)를 사다가 나누어드리려고 했는데, 한사코 드시지 않으려고 해서 혼자 다 먹은 적이 있었다. 별 일이 아니었던 그 순간을 할아버지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오렌지 세 개를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차오르면서, '아차, 이건... 그런 거구나. 이런 마음은 내가 머리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얄팍한 오만함이 머리 속에서 엄청난 속도로 붕괴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장통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갈 일이 있었다. 어떤 날에는 인파와 짐에 휩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웨웨(Wewe)!"하는 큰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같이 있었던 시장 관리자 아저씨가 먼저 알아차리시고는 내게 "Rafiki yako anakuita! (네 친구가 널 부른다!)"라고 말씀하셔서 돌아보니 복잡한 인파 사이로 나를 향해 양팔을 크게 흔들고 인사를 보내는 그 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그냥 울컥했다. 그리고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그 어떤 느낌에 다시 사로잡혀 그 인류학자에게 달걀을 가져다 준 소년을 떠올렸다.
'이게 바로 나의 달걀이구나. 그 오렌지가 바로 나의 달걀이었구나. 나도 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없겠구나.'
이걸 감동이라 불러야 하는지, 로맨티시즘이라 불러야 하는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wewe: 스와힐리어의 2인칭 대명사. 너 또는 당신이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