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르노, <단순한 열정> -
어젯밤엔 무척이나 피곤했고, 며칠 간 푹 자지 못한 잠을 보상받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다 버니니에 발렌타인을 섞어서 흔들어 마시고는 이불 속에 들어갔다.
새벽에 깼을 때는 그나마 컨디션이 나아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펴서 천천히 읽었다.
책을 다 읽고는 잠시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피드에서 힌디어로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인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첫 배낭여행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멀찌감치 등받이에 기대있다가도 몸을 쓰윽 당겨온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는 뜻이겠지.
별 뜻은 없었다. 좋아하던 남자애가 인도로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가장 멀리, 가장 새로운 곳으로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도에서 재밌다고만은 할 수 없는 스펙타클한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 그걸 얘기하자면 책을 쓰는 게 낫다. (게다가 인도여행 유행은 지나버렸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필름 카메라다.
집에 있던 필카로 사진을 찍는 일에 재미가 들려 있던 때라 여행에도 데리고 갔다. 아웃포커싱이나 빛 조절을 스스로 해보는 일이 재밌었는데, 알다시피 즉각 결과물을 볼 수 없다는 게 단점이자 장점이다. 대부분의 결과물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왔는데 그게 또 하나의 재미였다.
타인의 눈에는 필카를 목에 건 여자애가 신기해 보였는지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많았다. 카메라를 건네며 찍어보라고 주기도 했고, 내가 찍어보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진지하게 이 사진을 어떻게 받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메일 주소 정도를 주고받았다. 인도의 한 인터넷 카페에서 한 번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의 사진과 그날의 인상 깊은 풍경을 함께 전송하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했다. 나는 무엇에 응답하는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일까. 예의 같은 것일까. 이제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여행의 기억을 전하는 건 나의 순수한 기쁨이었을까.
한국에 돌아와 남아 있던 필름들을 인화하면서 맘에 드는 내 사진들도 많이 발견했다. 누군가가 바라본 나. 출발 전 공항에서 찍었던 나와 마지막 여행지에서 찍었던 나 사이에는 한 달 여의 시간이 있었다. 변한 게 느껴졌다. 더 자유롭고 반짝여 보였다.
시간이 흘러도 가장 사랑하는 사진은 일기를 메모하는 사진이다. 그때의 시간과 기분은 여전히 사진 속에 박제되어 있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항상 대부분은 미지수였다. 여행이 다녀온지 한참이 흘렀다. 그 후에도 어쩌면 나를 좋아했을지 모를, 또는 내가 좋아했을지 모를 어떤 사람이 찍어준 사진은 남았고 나는 그 사진을 간혹 들춰본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가 유부남이었고, 이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 또한 이 소설에서 크게 중요해지면 안 된다. 그 사실들은 소설을 이해하는 외적인 부분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때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혼자서도 잘 안다. 하지만 때로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동안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애매한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해석하게 만든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중략)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 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추억에도 현실에도 흔들리는 나 때문에 요 며칠 괴로웠다. 이 구절 덕분에 약간은 차분해진다. 작가는 “한 사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게 사치”라고 했다. 그 사치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사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사랑도 추억도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221009 끝.-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라는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써보았습니다. @tae.i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