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저주에서 빠져나오기, 제3원칙
새 학기 첫 수업 시간을 맞은 대학 강의실, 한 남학생의 눈길을 끈 여학생이 있다. 남학생은 그 여학생을 힐끔힐끔 보느라 교수가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여학생의 관심을 얻고 싶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면서 남학생은 어떤 말을 해야 여학생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1번: 무슨 과에요?
2번: 이 수업 끝나고 어디로 가시나요?
3번: 정말 예쁘시네요.
4번: 오늘 과제는 언제까지 제출하는 건가요?
당신이 그 남학생이라면 여학생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이 질문을 남학생들에게 던지면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3번을 택한다. 여성에게 ‘예쁘다’라고 하면 마음이 열리기 때문에 그다음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학생들의 호감을 얻는 남학생들은 4번 ‘오늘 과제는 언제까지 제출하는 건가요?’를 택한다. 이렇게 물으면 상대 여학생이 편안하게 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1, 2, 3번은 ‘나 중심’으로 하는 말이다. 처음 본 남학생이 ‘예쁘시네요’라고 말을 하면 여학생들은 당황할 뿐만 아니라 혹시 이상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 수업 끝나고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말은 자기를 따라오려고 하나 하는 불안감마저 들게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불편한 마음에 남학생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식의 저주는 나 중심의 사고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줄이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상대방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는 것)를 하는 것이다. 역지사지는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지 않고 타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인 ‘관점 수용 능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의 생각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다. “잠깐, 이 사람은 나랑 다를 수도 있잖아!”라고 생각을 하는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 만일 그들이 나와 관점이 다를 수 있고, 나 만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지식의 저주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한다.
지식의 저주라는 주제로 강의를 할 때 참가자들이 가장 자주 제시하는 해결책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저 사람 처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는가?”
“상사(부하)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결재를 올릴 때 1분만이라도 상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는가?”
“상대방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에 소개된 것이다.
집을 잠시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젊은이가 울고 있다.
때 마침 지나가던 어른이 물었다.
“젊은이,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집에 가는 길을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집이 어딘데 그러니?”
“이 근처인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세네 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사람이 자기 집도 못 찾는단 말이냐?”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20년이나 흘렀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집을 나왔다가 방금 전에 눈을 떴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길은 여러 갈래이고, 대문들이 서로 엇비슷해서 저희 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어른(서경덕 선생, 조선 중기의 학자, 황진이와의 관계로 잘 알려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마. 도로 눈을 감거라. 그리고 집을 찾아 가가라. 곧 너의 집에 다다를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젊은이는 다시 눈을 감더니 지팡이를 이리저리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일 이 어른이 젊은이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걸어 보라. 자신의 상자 안에 갇힌 채 세상을 보면 다른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특히 역지사지는 파워가 생기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파워가 커질수록 자기중심적으로 얘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왜 저들은 내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저들이 내 생각을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꽂혀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과의 대화가 단절돼서 결국 그 손해는 온전히 자기에게 돌아온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모를 수도 있다.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일까라고 물어야 한다.
<참고 문헌>
1. 박지원 (1997),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으시오, 김혈조 옮김,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