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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이 높다 하되

설악산 아래 뫼이로다

by 티제이

요즘 젊은이 답게,

등산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중국에서 몇 년 살면서 할 게 없다보니 다니던 산행이 어느새 취미처럼 되어 버렸다.


중국에도 한국 같은 명산문화가 있다.

명산문화란 쉬운 예로 태산을 두고 만들어진 수많은 시가나, 무릉도원을 담아 낸 산수화 같은 예술의 역사다. 환경파괴문제에 너그러운 편인 중국은, 장가계를 비롯한 대부분의 명승지를 대대적으로 개발해서 국내관광산업을 육성 중이다.

덕분에 황산이나 태항산처럼 명산문화를 잘 모르는 한국인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관광지는 물론, 중국의 5대명산은 모두 데크길과 케이블카, 혹은 엘레베이터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아직도 와이셔츠나 청바지를 입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 흔한 중국에서, 청명절이면 너나할 것 없이 봄나들이를 나가는 14억 인구의 인명사고(?)를 막으려면 필수적인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IMG_4383.JPG 황산 초입길. 포장된 길 외에 맨 땅이나 돌을 밟을 일이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은 청바지 입고 산을 오르고 있다.

중국에서 산을 다니며 나는 꽤 산을 잘 타는 편임을 깨달았다. 비리비리 한 주제에 10시간 넘게 1박2일짜리 베낭을 메고 산을 탈 수 있었던 건, 네 몸이 워낙 가벼운 덕분이라고 신랑은 주장했다. 그치만 결국 제일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건 신랑이니, 그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상 코빼기도 구경 못 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산을 타면서, 나도 그도 우리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날다람쥐 아니고 불다람쥐라니까?

한국에 돌아와서는 새 집 구하랴 어쩌랴 바빠서 동네 산 밖에 못 다녔다. 안산이나 인왕산 정도를 쏘다니며 신랑은 스스로를 '안산 불다람쥐'라며 기세등등했다. 어느새 신랑은 이정도면 설악산 한 번 다녀와도 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일정을 짰다. 애기 땐 부모님과, 20대 때엔 친구들과 설악산에 다녀왔던 그는,

중국에서 어느어느 산을 갈 때마다 비선대니 대청이니 하며 설악산의 한 풍경에 비유하곤 했던 것이다.

IMG_4419.JPG 황산의 절경.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에는 '악산'이 드물어서, 중국 대부분의 명산은 화강암 기반의 악산이다.

한국에 온 지 반 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설악산에 올랐다. 그제야 남편이 왜 그렇게 황산까지 가서도 설악산을 찾았는지 이해가 갔다.

야, 하 대박, 황산 별 거 없네!

오전 내 꼈던 구름이 점점 걷히고 슬슬 눈에 들어오는 진풍경을 두고 나는 실은 '개'자로 시작하는 비속어로 감탄사를 내뱉었더랬다. 황산에서는 분명 그 높이와 규모, 그리고 어느 판타지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처음 보는 풍경에 홀딱 반했다. 그러나 설악산에 오르고 나니,

굳이 뭐, 황산 가려고 비행기까지 탈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IMG_4432.JPG 굽이굽이 펼쳐진 황산의 절경. 맑은 날이 1년에 며칠 안 된다는데, 우리는 운이 좋았다.

황산에서는 무엇보다 산 타는 재미가 없어서다. 아무리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라 할지라도, 중국에서는 사방에 데크를 완비했다. 포장로 이외의 길은 부지런히도 막아놔서 맨 땅이나 돌을 밟을 일이 전혀 없다. 셔틀버스를 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 해발 500~1000미터 까지는 무조건 입장료에 포함된 셔틀을 타야 한다.

대단한 장비 하나 없는 우리가 며칠짜리 짐을 메고도 후딱후딱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건, 마주하는 모든 오르막 내리막이 모두 계단이었던 덕분이다. 황산에서는 20km에 5시간 정도 걸렸는데 설악산에서는 똑같은 거리에 두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피로도는 세 배 쯤 되었고, 감동은 그보다도 더 컸다.

특히 황산의 영객송은 실망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일송정이나 정일품송처럼, 중국의 황산에도 유명한 소나무가 있다. 영객송은 약간 너른 지대에 우뚝 자란 나무인데, 주변이 넓고 높이가 적당하다보니 바로 근처에 케이블카 정류장을 지었다. 워낙 유명한 소나무의 명성에 휴게소와 화장실까지 더해져 영객송 앞은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흩날리는 가이드들의 오색찬란한 깃발 아래 산과 나무를 감상할 여유가 생길리 만무했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와 케이블카는 어쩌면 중국 나름의 환경보호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데크가 없었다면 14억 인구의 발걸음 아래 산이 다 깎여 내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한계에 제약받지 않고 산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복지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중국은 어쨌든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국가니까.

그러나 인본주의가 지나쳐서 인간중심주의로 왜곡된걸까. 중국의 산에서는 언제나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남들은 3시간 기다려서 케이블카를 타고 10분 만에 올라가는 길을 3시간 반 만에 걸어 올라갔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설악산을 만나서야 직립보행 하는 짐승의 한계를 제대로 깨달았다.


그림에서 툭 튀어 나온 듯한 경치를 관람하는 것도 좋지만, 동네 뒷산이라도 내 발로 디디며 오르면 감상이 남다른 법이다.


p.s. 그래도 황산은 살면서 한 번 쯤은 가 볼 만한 곳이다. 빼어난 경치만큼은 중국의 다른 명산마저도 비할 바가 아니다. 테마파크처럼 안전하게 잘 꾸며놔서 중간중간 쉴 데도 많아 부상의 염려도 없고, 케이블카는 물론 푸니쿨라레도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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