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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Sep 12. 2020

소년이 소녀에게 - 1

그 애.



소년 -


늘 말없이 혼자인 그 여자애가 궁금하다. 다 같이 어울리면 좋을 텐데.

어느 늦은 오후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혼자 신발을 갈아 신고 집에 갈 준비를 하는 그 애를 본다. 노을이 나무 틈 사이에 내려앉아 신발 갈아 신는 플라타너스 벤치 길이 온통 붉다. 그 붉은 노을 틈으로 그 애의 갈색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흐들거린다. 운동화를 신은 발 끝을 톡톡톡 바닥에 몇 번 치더니 그 애가 고개를 든다. 나는 혹시나 마주칠까 황급히 눈을 돌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괜스레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간다.

걸을 때마다 넘실이는 머릿결이 참 예쁘다. 그 애는 옆에 있는 나뭇잎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걷다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버스를 타러 가려면 두 사람이 빠듯하게 들어갈만한 너비의 돌담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그 애는 갑자기 돌벽 가까이 다가가 담 사이사이 핀 꽃도 골몰히 들여다본다.

제 발 끝을 보며 걷다가 바닥에 있는 금들을 피해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그러다 우뚝 골목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기에 나도 하늘 한번 따라 본다.

빨갛게 노을 물든 구름이 살짝 내려앉아 손에 닿을 것 같다.


아 예쁘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그 애가 웅얼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조용히 웃는다는 게 콧잔등으로 소리가 그만 새었다.

그 애가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맑은 눈이 토끼만치 커다래지더니 고개를 훽 돌려 휘청이며 달아난다.
뭐. 어쩌면 그 애가 그렇게 달아난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화끈해진 내 얼굴이 홍시보다 더 붉었을 것이므로.

귀 뒤까지 뜨거워져 괜스레 손으로 목 뒤를 긁적였다.


집으로 가는 길엔 나도 모르게 배실배실 웃기에 친구 놈이 미쳤냐 한다.






소녀 -


별일이 다 있다. 별일이다 별일. 그래 별스러운 일이다.

그 애가 웃었다.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과 게시판에 적을 몇 가지 공지사항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더랬다.

늘상 집에 함께 가는 9반 투덜이 민정이도 먼저 보내고, 아이들이 거의 사라진 플라타너스 길을 혼자 터덜터덜 걸었다.

오히려 좋다. 무리 지어 부러 남들 들어라 깔깔 웃어제끼는 애들두 없구, 늦여름의 플라타너스 찝찔한 이파리 냄새도 좋구.

교문까지 기다랗게 이어진 이 길의 어중간한 중간쯤 앉아서 신발주머니를 꺼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다섯 시. 어쩐지 몸이 좀 뻐근하더라니. 천천히 운동화를 꺼내고 지친 발을 하나씩 끼워 넣는다.

바람이 살살 불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렸다. 신발도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볼 언저리가 간지러워 고개를 드니..


어..? 저기 멀리 그 애가 보인다.


먼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 애의 뒷모습.

왜 아직 안 갔을까 하니 우리 반 최고의 떠벌이 주철이 녀석과 둘째가라면 서러울 민구, 바닥에 나뒹구는 농구공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더 멀리엔 그 애 눈에 들겠노라 돌계단에 앉아있는 얄미운 여자애들도.


늘 사람에 둘러싸인 그 아이. 나와는 참 다른 그 애. 그 애의 얼굴은 달콤 쌉싸름한 모카빵 색이다. 머리는 우리 집 복실이처럼 복실복실 하니 눈 앞까지 내려와 앞이나 잘 보이려나. 저 얇고 매끈한 다리로 어찌 슛 하나나 제대로 할까 하다가 퍼뜩 놀라 짐을 챙겼다. 언제나 늘 혼자인 내 모습을 그 애한테만은 보이기 싫다.

발아 발아 빨리 걸어다오 그 애가 돌아보기 전에.



하굣길에 애들이 없으니까 좋다. 천천히 좋아하는 것들을 발걸음 맞춰 좋아할 수 있다.

건물 철조망 틈으로 삐쭉삐쭉 얼굴 내민 나뭇잎도 쳐다보고 푸르럭 대며 매연 뿜고 지나가는 버스 소리도 듣고.

그중 엄지손가락 꼽아 제일 좋아하는 건 골목길이다.

2번 종점으로 가는 좁다랗고 긴 골목길은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면 비밀통로 같다. 비밀의 화원으로 향하는 것 마냥.



돌 담벼락에는 기를 쓰고 영차영차 기어올라 피어난 기특한 꽃들이 있다.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꼬. 수고했노라고 눈 한번 맞춰준다.

고개를 살짝 추켜 들면 코끝에 닿을 것 같은 하늘도 있다. 붉은 하늘에 물감 드는 구름이 예뻐 한정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풋’ 한다.

놀라 소스라쳐 돌아보니... 그 애다.


모카빵 복실이.


머리카락 사이로 커다랗게 그 애의 눈이 놀랐다. 안 그래도 외꺼풀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나는 혼자인 내 모습이 부끄러워 앞도 안 보고 달린다.


쿵쾅쿵쾅 심장이 제멋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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