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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Oct 20. 2020

소년이 소녀에게 - 3

말 없는 아이.



소년 -

아침부터 그렇게 설렜다. 언젠가부터 눈 속에 담았던 그 애와 뭔가 둘만의 얘기가 생긴 것 같아서. 말을 걸어볼 ‘꺼리’라는것이 생긴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던히 되뇌고 생각했다. 즐겁기만 한 고민에 발끝에 채이는 돌부리마저 장난스럽고 귀엽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학교에 도착해보니 어쩐지 그 애가 날 피하는 느낌이다. 꼿꼿한 그 목은 단 한 번 내쪽으로 돌릴 기색이 없다. 오기가 생겨 나도 절대 고개 돌리지 않는다. 돌아볼 때까지 기다릴양으로 그 애 뒷덜미만 본다. 쉬는 시간이 끝나가는 초침 소리가 귓바퀴에 들리는 것 같다. 끝까지 그대로인 고집스러운 가스나.



한 반이 된 지 벌써 한 학기인데 제대로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다니 좀 이상하다. 늘 다가오는 건 상대방인 게 익숙해져 미쳐 빠진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루가 다 가도록 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무리 쳐다봐도 그 애는 알지를 못한다. 그러기에 이번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꼬빡 하루 만에 또다시 어쩌다 노을 진 플라타너스 아래다. 노을 아래선 그 애가 어쩐지 더 예뻐 보인다.


 신발을 고쳐 신고 있는 그 애 앞으로 다가갔다. 반응이 없길래 더 바짝 다가섰다. 이래도 모른다. 둔하기로 치면 첫째가래도 서럽겠다. 더 기다리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릴라 차라리 말을 걸었다.

- 저기..



말갛고 하얀 얼굴의 그 애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왜냐고 묻는다.


- 너 나 피해? 왜...?


하루 종일 궁금했던 그 질문을 이제야 털어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다를 들이켠 듯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말해봐, 날 왜 그렇게 하루 종일 피해 다녔는지 좀.


-아. 아니. 저기..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돌아오는 대답에 내 속은 다시 고구마를 열개쯤 먹은 것 같다. 그리고는 황급히 멀어져 가는 그 애를 어쩐지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벤치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찾아서 달렸다. 쪼끄만 게 다리는 길어가지고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다.



힐끗.
분명 내가 따라간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모른 척이다. 일부러 큰소리로 다리를 내굴러본다. 탁탁탁탁. 이쯤 되니 둔하다고 생각했던 건 다 내 착각이었다.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왜? 이유 없이 사람을 외면하다니. 속에서 심술이 부글부글 대길래 장난을 좀 쳐볼까 싶다.


탁탁탁탁탁. 더 크게 따라가 본다. 역시나 그 애가 멈춰 선다. 너도 한번 답답해봐라. 나도 멈춰 서고 딴청을 좀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애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볼이 볼록 부풀었다. 에이 꼬시다.


탁탁탁탁탁 더 골려줄 양으로 신나게 발을 굴러 쫓는데 그 애가 예상치 못하게 훽 돌았다. 바로 멈추지 못하고 그 애의 코앞에 멈춰 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 애의 머리칼에서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뭔지 모르게 가슴팍이 간질간질한다.


-왜 따라오는데?
 


왜 따라가긴. 몰라서 묻는 거야?


-나도 집에 가는 길인데? 따라간 거 아닌데?


 당황하며 요리조리 방황하는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쿡쿡 새어 나온다. 아, 이 향기 어디서 맡아봤더라? 광고에서 많이 봤던 그 샴푸 같은데. 아침에 버스 타고 학교 가는 길에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 물기 머금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려온 아무개의 머리칼 냄새. 기억을 회귀시키고 있자니 그 애가 토라진 얼굴로 다시 멀어진다. 이제 그만 골려주고 정말 궁금했던걸 물어볼 참이다.


 어느새 골목길 중간쯤. 어제 봤던 그 하늘과 그 꽃잎 사이로 그 애와 함께 걸어간다. 말없이 걷고 있는 게 이상하게도 어색하지가 않아 당분간 그렇게 걸었다. 자박자박자박 발걸음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잠깐씩 지나가는 바람결에 기분이 괜스레 좋다.



 그 애는 말이 없는 건 아빠를 닮았고 말간 얼굴은 엄마를 닮았단다. 말은 내가 많이 할 거니까 말없는 건 괜찮고 말갛고 순진해 보이는 저 얼굴은 조금 문제이긴 하다. 자꾸 보게 될 것 같아서. 자주 보면 정드는데.


 아차차.. 그런데 저 눈치 없는 성격은 누구를 닮았을까? 왜 따라오냐니 말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굳이 말로 표현하는 게 더 힘든 것 아닌가. 바보 같은 가스나. 답답한 가스나.


-너 바보구나?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답을 찾는 건 그 애에게 맡겨둔 채로 일보 후퇴. 조금씩 불편해질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감각이 생경하여 오늘은 여기서 나를 위해서도 돌아섰다.

 골목 끝에선 2번 버스가 털털거리며 길게 매연을 내뿜고 멀어지고 그 애의 발걸음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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