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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Oct 26. 2020

소년이 소녀에게 - 4

소나기


소녀 -


내게는 몹쓸 병이 있다. 고치지도 못할 유전병. DNA에 새겨져 평생을 가져가야 할 천하의 불치의 병. 이 병은 아빠한테서 왔단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아빠를 지켜보고 있자면 뼛속까지 아빠로부터 온 염색체가 아닌가 싶다.


사실 난 이상한 애가 아니다. 말이 없을 뿐. 것도 아니다. 투덜이 민정이랑은 조잘조잘 제법 말도 잘한다. 단지 없다면 주변머리가 좀 없다. 조금 많이. 이게 바로 아빠에게서 온 바로 그 유전병이란 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말 섞는 것이 내겐 그렇게 어렵다. 처음엔 어색하다. 그래서 그 어색함을 어떻게 깨 볼까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리다 보면 긴장감에 손에 그렁그렁 땀이차고 피가 빨리 돌아 심장이 나대고 글자가 조각조각 나 머리가 뱅뱅 돈다. 제시간에 애들이 원하는 맞장구  받아치는 건 그래서 애저녁에 포기했다.

 가족행사가 있을 때면 아빠는 술을 한잔 걸치지 않는 이상 말 한마디를 못했다. 가족들 틈에 조용히 껴있다가 어색해지면 엄마 주변을 맴맴 돌다가 실없는 농담 한번 던지고는 주변은 어색하지 않은데 혼자 그렇게 어색해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그래 있는 거다.


그래서 어쩌다 보면 또 덩그러니 혼자가 된다. 지금의 나처럼.


 나 같은 세상살이 16년 차 중학생한테 무엇이 제일 무섭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다. ‘다르다’, ‘속해있지 못하다’ 일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를 또래집단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그 또래집단 속에 속하는 것이 어려운 아이는 제가 괜찮더래도 다른 아이들의 눈총을 받는다. 그 눈총 때문에 나는 또 달팽이처럼 움츠려 든다. 참, 달팽이는 제 몸 숨길 집이라도 있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 2년쯤 된 것 같다. 아이들 틈에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던, 그래서 호흡 곤란으로 쓰러진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약을 먹는 것보다 선생님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언젠가는 이 불안함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 안다고 말해주신다. 괜찮다고 말해주신다. 그러다 보면 정말 괜찮아질 것 같다. 단단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괜찮아질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시면, 정말로.


 약은 일종의 플라세보 역할이다. 그저 곁에 들고만 있어도 불안감을 앉혀줄 수 있으니까. 다시 또 애들 앞에서 가슴을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막 주는 게 이 분홍색 마법의 알약이다.


 2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증상도 없고 처음 이곳에 왔던 때보다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익숙해졌다. 어떻게 버텨야 되는지, 어떻게 나를 달래야 하는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더 세상을 마주하며 배우고 연습했다. 선생님도 이제 그만 와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지만 어쩐지 아직은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아 한 달 두 달 미루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녀석을 이곳에서 마주치게 하기 위한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질기기도 하다. 운명의 장난.


하늘에선 연신 쿠르릉거렸다. 그러다 번쩍, 하고 세상에 하얀 번개 줄기가 다녀가면 쾅, 하고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더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아,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늦여름, 초가을이면 어김없이 올라오곤 하는 태풍.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비가 내릴게 뭐람. 서둘러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에 집으로 가려고 허둥대며 유리문 앞에 섰는데.


우리는 또 그렇게 마주쳤다. 순간 또 쾅, 하고 벼락이 내린 것 같기도 하고.


하필이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이곳 정신의학과 병동에서. 우리의 마주한 눈동자는 그렇게 허공에서 부딪혀 갈곳 없이.. 오늘 내린 이 소나기처럼 바들바들 흔들렸다. 비를 잔뜩 맞은 그 애의 얼굴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미, 피할 길 없이 빗줄기가 굵어졌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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