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
소녀 -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가리던 초가을의 물줄기도 잦아들고 월요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토요일 아침 병원에서 어색한 마주침 끝에 나는 다시 그 애를 뒤로하고 빗속을 달려 집에 왔다. 그 애의 눈이 닿으면 등 뒤가 홧홧하고 따끔거리는 건 빗속에서도 똑같더라. 주말 내내 눈꺼풀만 눈 위에 올려놓고 정작 잠은 한숨도 못 잤다. 생각이 머릿속을 동동 맴돌아 잠이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로 맴도는 건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커다란 눈으로 나를 꿰뚫던 그 애의 얼굴이었다.
그 애는 왜 거기 있었을까, 나는 왜 거기 있었을까. 정신과 병동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정신병자라고 학교에 소문이나 내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와서 또 내 시선은 분홍색 마법의 알약으로 향하고 그다음으로는 손이 다가간다. 그러다 이내 거둬들였다. 난.. 정신병자가 아니야.
영영 오지 않았으면 했던 오늘도 날은 밝았다. 내 기분이 어떻든 관심 없는 세상은 째깍째깍 제 할 일을 한다. 비도 멎고, 해도 뜨고, 그 애를 마주 할 시간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오늘은 어쩐지 또 하루 종일 그 애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체육시간에 그만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갔지 뭐. 같은 반이면서 피한다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되긴 하다.
운동장은 온통 빗물에 젖어 모래가 찰퍽거렸다. 그 위에서 체육을 할 수 없으니 체육관이 따로 없는 우리 학교는 비가 온 다음 날이면 플라타너스 벤치 앞 너른 길에서 체육 수업을 했다. 오늘은 줄넘기 수업이었다. 이단 뛰기를 한번, 두 번,,, 그렇게 스무 번 넘고 나면 통과다. 줄넘기라면 자신 있던 나는 단박에 스무 번 그까짓 것 뛰어버리고 얼른 그 애를 피해 운동장 쪽 스탠드로 향했다. 스무 번이나 다 뛴 사람은 상으로 쉬는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돌로 되어있는 스탠드는 빗물이 없이 꼬들꼬들해 그런대로 앉을만했다. 앉아서 땅이 꺼지나 내가 꺼지나 한숨을 푹푹 몰아쉬고 있는데 언제 쫓아온 건지 그 애가 덜컥 내 옆에 앉아버렸다. 도망갈 틈도 없이. 또 외커플 커다란 눈동자로 빤히 보는데, 이번엔 정말 하는 수 없었다.
-잘 들어갔어? 비 많이 왔었는데.
벌써 저 멀리서부터 이 녀석을 흠모하는 여자애들의 따가운 시선이, 떠벌이들의 시선이 바늘 같다. 이렇게 나는 또 공공의 적이 되는가.
-응. 집이 가까워. 병원에서..
-좋겠다. 우리 집은 멀어서 매번 택시 타고 가는데.
매번? 왜 가는데..? 거길 왜?
-병원은.. 왜 다니는 거야? 물어봐도 돼?
내가 먼저 묻고 싶었던 그 질문을 그 애가 선수 쳐 물었다.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묵묵히 생각을 떠다니는 단어를 한 개씩 들고 되짚어 정답에 가까운 말을 찾아보는데 그런 건 없더라. 그래서 내가 궁금한걸 먼저 물었다.
-넌.. 내가 안이상해? 말도 없고. 늘 혼자 다니는데.
그 애가 빤히 본다. 정말 모르겠다고 말하는 얼굴인거야, 지금.
-그게 왜 이상해?
딱히 할 말이 없네. 왜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애들이 싫어하잖아. 혼자 있는 애. 나 같은 애.
-말이 너무 없어서 다녀. 병원. 사람들 앞에서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불안해해서.
-그렇구나. 지금 내가 옆에 있는 것도 불편해, 그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면 그 애가 멀어질 것 같고, 아니라고 하자니 거짓말이고.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아이들만큼은 아니라고 할까? 니가 멀어지는 건 싫은데.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처럼 니가 불편하고 어색하진 않았어. 어쩐지 처음부터. 그건 참 이상한 일이야.
결국 대답 못하고 발로 애꿎은 돌바닥만 퍽퍽 쳤다. 그렇게 볼이나 부풀리고 입을 비죽였다. 그러다 그 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프시다고. 엄마가 혼자 마음의 벽을 만든 지 2년이 되어간다고. 그 벽이 허물어지길 기다리며 늘 함께 병원에 가주고 있다고. 쓸쓸한 표정을 매달고 피식 웃는데 미소가 참 슬펐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없어도 사람이 충분히 울 수 있다는 것을 그 애를 보며 느꼈다. 그러면 또 그 애의 머리칼이 부스스 내려와 눈을 덮고 바람에 헝크린다. 울지 말라고 두 눈을 가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2년이라면, 나도 꼬박 2년을 다녔는데 왜 우린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을까? 그러다가 이제서야, 같은 반이 되고 서로를 알게 된 이제서야 그곳에서 마주쳤을까?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그냥 그 애를 바라봤다. 이상하다. 다른 애들과 있을 때처럼 긴장되거나 불안하지 않더라. 민정이 이외에 이런 사람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 말처럼 괜찮다 괜찮다 해서 괜찮아진 걸까,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에 감정이 마모가 되어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면 너와 내가 가진 공통점을 내 눈이, 다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덧없이 뛰어대던 내 심장이 알아본 걸까.
한참을 그렇게 그 아이를 바라보는데 그 애도 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오늘도 바람 속엔 플라타너스 냄새가 짭짤하게 들어있다. 체육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면 우리는 슬슬 일어나서 엉덩이에 묻었을 흙을 대충 털고 다시 플라타너스로 돌아간다. 어쩐지 일주일 새에 더 성큼 키가 커버린 것 같은 모카빵 복실이의 뒷모습을 나는 그렇게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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