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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때

by 태연

외로움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건 마치 한겨울 눈밭에 혼자 서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누가 내 옆에 있는지, 어떤 말로 위로받는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나는 그저 내 숨소리를 듣고, 내 손끝의 떨림을 느끼고, 내 안의 고요한 울림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게 된다. 외로움은 더 이상 나를 덮치는 감정이 아니라, 조용히 곁에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것이 되었다.

나는 요즘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전의 외로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다. 그전에는 마치 욕심 많은 아이가 투정 부리듯, 결핍을 메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외로움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외로움이라는 얼굴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외로움은 어릴 때의 나, 누군가의 품을 갈구하던 내면의 어린아이가 느끼는 외로움이었다. 때로는 짜증처럼, 슬픔처럼, 때로는 갑작스러운 충동처럼 튀어나왔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증, 존재의 증명이 필요한 상태에서 피어난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외로움은 결이 다르다. 엄청 깊은 곳에서, 수면 아래의 고요함 속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그것은 더 이상 뭔가를 원하거나 갈망하지 않는다. 손을 뻗어 누구를 붙잡지도 않고,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감정이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조용히 자리한 감정. 그 외로움은 결핍이 아닌,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피어난 감각이다.

고요하고, 차분하며,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감정.

그건 더 이상 내가 피하거나 치워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감정이 되었다.





이 두 외로움은 이름만 같고, 완전히 다른 본질을 가진다.

전자의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채워지길 바라며 흔들렸고, 후자의 외로움은 관계가 아닌 내 존재 안에서, 나라는 깊은 숲 안에서 피어난다. 전자는 울음을 동반했고, 후자는 침묵을 동반한다. 전자는 손을 내밀었고, 후자는 손을 거두었다. 그 둘은 같은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영혼의 감각이다.
이 외로움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함께 온, 아주 오래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개체로 존재하게 된 순간부터 생긴,

'기억을 잃은 영혼'으로서의 인간이 느끼는 감정. 그래서 외로움은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이자,

돌아가야 할 집으로 향하는 나침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반가운 손님처럼 맞이한다.

혼자 있는 저녁, 창밖의 빗소리와 함께, 나는 그 고요함을 찻잔에 우려내 마신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내 안에서 여백을 만들고, 그 여백 속에서 내가 진짜로 숨 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는 안다. 더 이상 채우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것이 내가 말하는

외로움이 외롭지 않은 순간이다.

외로움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초월한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이 감정의 이름은 여전히 ‘외로움’ 일 수 있지만, 그것은 이제 고요, 명상, 연결,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된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에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의 외로움은 품을 찾고 싶어 울던 감정이었다.

지금의 외로움은 내가 나를 껴안는 깊은 고요다.

이 둘은 이름은 같지만, 결도, 목적도, 깊이도 완전히 다르다.


나는 지금, ‘채워지지 않아서 아픈 외로움’을 지나


'내가 나에게로 돌아와 비로소 안긴 외로움'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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