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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구두를 신은
Jul 20. 2024
[소설] 담장 위 하얀 찔레꽃 9화
- 궤도 이탈
4교시 수학 시간이 되었다. 수학 선생님은 출석부에 서명을 한 후 툭 하고 출석부를 교탁 옆 보조 책상에 던졌다. 그 움직임에서 미세한 불쾌감이 흘러나왔다.
“선생님이 임용고시 준비할 때 교육학을 열심히 공부했거든. 거기에 이런 게 있었어. 시험 성적이 저조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에 대한 연구.”
수학 선생님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들은 시험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소문으로 들었던 민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유형은 ‘내가 공부를 좀 덜한 것 같아.’ 원인을 본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는 유형, 두 번째 유형은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웠어’ 원인을 문제에 돌리는 유형. 어느 쪽이 다음 시험을 잘 볼까?”
학생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학 시간에 대답을 독점하던 성우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까닭이다. 잠시의 침묵 후에 선생님이 말했다.
“당연히 첫 번째 유형이겠지. 시험 문제의 난이도는 응시자 입장에서 조절할 수 없잖아. 조절할 수 없는 것에 책임을 물으면 발전할 수 없다는 거야.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요소에 노력을 기울이면…”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성우가 뒷문으로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학 선생님은 성우의 뒤통수를 바라볼 뿐 앉으라고도 거기 서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학생 한 명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그렇다는 거지. 아, 세 번째 유형도 있었다. 사회나 제도 탓을 하는 거. 그 유형은 성장 가능성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네. 책 펴자. 45쪽.”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마지못해 책을 폈다. 그때 재영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쳐다보자 재영이 교탁 앞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이자 재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뒷문으로 나갔다.
학교 뒤편 산자락으로 걸어가고 있는 성우 모습이 보였다.
“성우야”
“아, 깜짝이야. 뭐야? 너 어떻게 나왔어? 미인정 결과 처리되고 싶어?”
성우가 말하자 재영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 아니냐? 나는 선생님한테 허락받고 나온 건데?”
“아, 짜증 나. 괜히 옴팡지게 욕먹지 말고 네 갈길 가라.”
성우는 재영이를 무시하고 산 쪽으로 난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산에는 숲체험장이 있었다. 짚라인과 나무 소재로 된 놀이 기구들 뒤편에 벤치가 있었다. 성우가 앉자 그 옆 벤치에 재영이도 앉았다. 성우는 말없이 학교를 바라보았다. 등하교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여기에서 보니까 학교가 멋져 보이네. 운동장도 널찍하니. 교문에서 보면 건물이 꽉 막고 있어서 숨 막히는데.”
재영이가 말하자 성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나 어렸을 때 여기서 많이 놀았는데.”
성우가 갑자기 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이 대답했다.
“알지. 4학년 때. 여기서 학급 야영도 하고.”
“어?”
성우가 재영이를 바라보자, 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4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백샘”
“진짜?”
그러고 보니 재영이와 비슷한 애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백장열 선생님 보고 싶다. 그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그랬지. 샘이 밤에 산꼭대기에서 기타 귀신이라면서 노래도 부르고.”
“맞지, 물총놀이도 하고.”
둘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성우의 웃음 끝이 흐려졌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 버렸냐.”
성우의 하얀 신발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시험 망치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냐?”
주현이가 계단을 올라오면서 말했다.
“성주현 미쳤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성우는 주현을 보자 반가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너 이렇게 사고 칠래?”
주현이 성우가 좋아하는 그 새침한 표정으로 물으면서 성우의 옆 벤치에 앉았다. 반대 편 쪽으로 앉아 있는 재영이와 눈이 마주쳤으나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럼 그 굴욕을 내가 당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응? 이 진성우가?”
“……”
성우의 말을 끝으로 셋 모두 말이 없다. 멀리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아 학생들은 저마다 무리 지어 골대를 향해 공을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작게 보이는 법, 학생들의 움직임은 경쾌해 보였고 질러대는 소리도 즐거워 보였다.
“뭐가 저렇게 평화롭지?”
성우가 말했다.
“나만 전쟁통인가?”
주현과 재영은 옆에서 듣고만 있을 뿐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셋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듯 운동장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를 뿐이었다.
“내가 한 방에 너를 평화롭게 해 줄까?”
한참만에 주현이가 말했다.
“뭐 어떻게? 너도 시험 망쳤다는 거? 시험 망친 거는 나도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그런데 진짜… 민원이 웬 말이냐고… 수학 선생님 하는 말 들었지? 민원 들어온 거 짜증 나니까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거 아냐.”
성우가 답답한지 앞섶을 들썩거렸다.
“그런 엄마가 나한테는 없다.”
주현이가 말했다.
“뭐?”
성우가 주현이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잠깐 뜸을 들여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왜 너도 민원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네가 틀린 문제만 맞춤으로다가 재시험 볼 수 있게?”
얼굴이 벌겋게 된 성우를 보면서 주현이 살짝 웃더니 이내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민원 넣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그냥 엄마 자체가 없다고.”
성우가 상황을 깨닫고 주현을 바라보자 주현이 조금 더 밝게 말했다.
“맞지? 내가 한 방에 너를 평화롭게 만들었지?”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성우는 몰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몰랐어.”
“그렇지, 엄마 없는 애인 거 티 안 내려고 나 노력 많이 해.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그게 콤플렉스야.”
다시 침묵… 아닌 게 아니라 주현이의 말로 성우는 순간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뭔가가 쑥 상황이 달라지는 느낌. 엄마의 그 모든 서포트들이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성우의 생활에 엄마가 없다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늘 성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모든 일정을 성우에게 맞췄다. 성우가 시험 기간이면 자신의 수면 패턴을 바꿨고 성우가 시험을 마치면 홀가분해하면서 아는 사람들과 치맥 모임을 가졌다. 엄마는 성우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였다. 그 껍데기가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 진짜 지금은 학교에 못 들어갈 것 같아. 5교시 시작할 때 됐어. 들어가.”
“넌 어디로 가는데?”
“발길 닿는 대로.”
성우가 숲 쪽으로 가자 두 사람도 따라갔다. 재영이가 말했다.
“이 산 넘어가면 그때 우리 학급 야영했던 학교 나오는 거 알아? 거기 가볼래?”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이곳에 갓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이 있었는데 4학년 때는 야영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왜 이러지? 너희 선생님들 안 무서워? 미인정결과에 선도받을 수 있다고.”
성우의 조바심에도 둘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셋은 산을 넘어 폐교에 갔다. 작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것, 구령대에 모여서 야참을 먹었던 것, 야간 산행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7년이란 세월은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입시라는 절벽 앞에 선 어른 직전의 어설픈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