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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Dec 18. 2021

[동화]  아재라고 부르라고?

나이가 같은데...


                 아재라고 부르라고?



  내가 동수를 만난 게 지난겨울방학이었다. 시골 외할머니댁에 며칠 놀러 갔었는데 할머니께서 내게 동수를 소개해 주었다. 


  동수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나는 친구가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억울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동수가 내게 아재가 된다고 했다. 왜 아재냐고? 할머니께서 손가락으로 촌수를 꼽아 보시더니 내게 7촌 아재가 된다며 아재라고 부르라 하셨다. 


  나는 괜스레 머쓱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아재라고 부르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수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재라는 동수도 나를 쳐다보며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색하게 처음 만났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마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랬던 것 같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나오기가 싫어서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워 있었다.


   "할매! 일어나싯습니꺼?"


  "그래, 왔나? 어서 오니라. 눈도 오는데 아침부터 와 왔노?"


  밖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누가 찾아왔을까?


  "울 엄마가 이거 갖다 주라 캐서요."


  나는 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열린 문 틈으로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매섭게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 보았던 그 동수라는 아이가 할머니에게 작은 소쿠리를 건네주고 있었다.


  "대구에서 온 조카는 아직 안 일어났나 보네예?"


  동수는 내가 있는  방문 쪽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와 누어 자는 척했다. 조카라고? 나이도 같은데 조카는 무슨 조카.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아직 말도 한 번 해 보지 않았지만 괜스레 동수라는 아이가 기분 나빴다.


  나는 동수가 가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밤새 하얀 눈이 내려 있었다. 헛간 지붕 위에도, 감나무 가지 위에도, 마당 구석에 있는 개집 위에도, 담장 위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이다. 대구에서는 눈이   자주 오질 않아 눈 구경하려면 눈썰매장에나 가야 볼 수 있는데 말이야. 나는 기분이 좋아서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눈을 밟아보았다. 할머니께서 "우리 워리" 하며 부르시는 늙은 개도 겅중거리며 좋아했다. 감나무 위에서 까치도 울고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기분이 좋은가 보다.


  "욱아, 어서 씻거래이. 할미가 물 떠세 놨다. 전에 너거 집에 가 보이께내 뜨신 물로 세수하대?"


  할머니는 부엌에서 더운 물이 가득 담긴 세숫대야를 들고 나와서 수돗가에 내려놓았다. 나는 물이 너무 뜨거워 수돗가에 쌓인 눈을 한 뭉치 뭉쳐서 대야에 넣었다. 눈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눈을 뭉쳐서 대야에 넣어 보았다. 역시나 눈 깜짝할 사이에 눈은 사라졌다.


  "세수 안 하고 뭐 하노? 빨리 씻고 밥 묵어야제."


  아침을 먹고 방학숙제를 하고 있는데 동수가 또 왔다. 할머니는 오늘이 읍내 장날이라며 외출을 하시고 없었다.


  "어? 할매가 안 계시네. 장에 가싯나?"


  동수는 내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서 워리하고 조금 놀다가 그냥 갔다. 나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재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먼저 말을 걸기가 싫었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숙제를 마치고 동네 구경이라도 할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워리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집들은 모두 할머니 집과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마을길은 눈이 한쪽으로 치워져 다니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을 돌아 나가자 눈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은 온통 하얀 눈밭이었다. 그 들판 중간의 논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논바닥은 가두어진 물이 얼어 빙판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시합이라도 하듯이 찬바람을 맞으며 씽씽 잘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앉은뱅이 썰매가 신기했다. 책에서 그림으로 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썰매를 타고 노는 아이들 가운데서 동수가 보였다. 동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 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곁에 있던 워리가 아이들을 향해 컹컹거리며 달려가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모두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들의 눈길을 받고 괜히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점심을 먹고 난 뒤, 할머니는 내게 숭늉 그릇을 건네주며 말하셨다.


  "욱아, 책 보는 거도 좋지만, 사람은 건강한기 최고라 안 카나. 얼라들은 뛰 댕기야 하는 기라. 그란데, 동수 이놈아는 어델 가서 코빼기도 안 비나? 아재라 카는기 조카하고 쫌 놀아주지 안 하고."


  나는 조카라는 소리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할매! 계십니꺼?"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밖에서 동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셨다.


  "오냐, 니는 밥 묵었나? 니는 혼자 어델 돌아댕기노? 욱이 데불꼬 쫌 놀진 안 하고."


  동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더듬거렸다.


  "아, 내가 딴 거 할 끼 많아서예. 난중에 시간 나면 그라께예. 할매, 울 엄마 심부름 갈 건데, 이거 좀 여기 놔두고 갖다 올께예."


  동수는 감나무 옆에다 앉은뱅이 썰매를 두고 뒤가 급한 사람처럼 달려가 버렸다.


  "쯧쯧, 머가 그리 바빠서. 어린 자석이."


  나는 마당으로 나와 감나무 옆에 놓아둔 앉은뱅이 썰매를 만져 보았다. 아까 논에서 보았던 것처럼  썰매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타는 시늉을 해보았다.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워리가 즐겁게 짖어대며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뛰어다녔다. 


  나는 얼음 위에서 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썰매를 들고 오전에 가 보았던 논으로 나갔다.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둘러 단단히 준비를 하고 말이야. 워리도 즐거운 듯이 겅중겅중 나를 따라왔다. 


  논에는 어린아이들 서너 명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없는 쪽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앉은뱅이 썰매 위에 올라가 쪼그려 앉았다. 


  그런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밀대를 양손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조금 앞으로 나가는 가 싶더니 꽈당하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엉덩이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썰매를 주워 올라탔다. 그러나 썰매는 나를 놀리듯이 쫄딱쫄딱 자꾸만 나를 미끄러뜨렸다. 꼬마 아이들이 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킬킬대며 웃고 있었다. 


  나는 열 번도 더 넘어지고서야 겨우 균형을 잡고 조금씩 나갈 수 있었다. 썰매가 조금씩 나가자 솔솔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얼굴에는 땀 방우리 생기고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꼬맹이들도 내가 넘어지지 않고 썰매를 타자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동안 넘어지지 않고 잘 미끄러지고 있던 나의 썰매 앞으로 누군가 쌩 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덩치가 큰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야아~, 곰배다!"


  꼬맹이  하나가 소리쳤다. 아마 곰배가 그 아이의 별명인가 보다. 곰배란 아이는 계속 나의 앞길을 방해했다. 내가 조금 잘 나간다 싶으면 슬쩍 내게 다가와 툭 치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쿠당탕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곰배는 재미있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나를 조롱했다. 나는 화가 났지만 나보다 덩치가 더 커 보이는 곰배에게 덤빌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의 화를 돋운 것은 얼음이 녹아 물이 고여 있는 빙판을 지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달려와 나를 넘어뜨리고 갔을 때였다. 나의 옷이 물에 축축이 젖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 곰배를 향해 달려갔지만, 마치 내가 덤빌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건들거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와? 한번 해 볼끼가?"


  나는 곰배의 위압적인 태도에 기가 죽고 말았다. 그냥 힘없이 옷에 묻은 물을 털고 썰매를 챙겨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고 말았다. 워리도 낑낑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다음날, 나는 점심을 먹고 썰매를 옆구리에 끼고 또 논으로 나갔다. 아침 일찍 잠결에 동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자기 썰매를 가지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을 먹고 난 뒤 마당으로 나가 보니 감나무 밑에 여전히 앉은뱅이 썰매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워리와 함께 논으로 갔다. 혹시나 어제의 그 곰배가 있지나 않은 지 눈여겨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곰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어제보다는 더 잘 탈 수 있었다. 나는 자신감이 생겨 좀 더 빨리 달리기도 했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아이들과 함께 경주도 했다. 아이들은 내게 브레이크 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한창 즐겁게 썰매를 타고 있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곰배다! 곰배가 왔다!"


  아이들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다보았다. 곰배가 어깨에 썰매를 매고 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한창 재미있게 썰매를 탔던 것을 생각하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썰매 타는데 열중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곰배는 슬슬 나의 앞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보다는 잘 탈 수가 있었기 때문에 곰배의 훼방을 조금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곰배는 노골적으로 내게 부딪쳐 왔다. 내가 잘 타는 꼴을 보기 싫다는 듯이...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곰배를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곰배의 훼방으로 나는 몇 번이나 넘어져 옷을 버리고 말았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썰매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나의 등 뒤에서 곰배가 빈정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봐라, 역시 도시 놈들은 약골이라니까, 약골. 하하하!"


  나는 약골이라는 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썰매를 내팽개치고 곰배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나의 공격에 곰배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나는 곰배를 타고 올라앉았지만 이내 힘이 달려 내가 곰배의 밑에 깔리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태권도장에서 배운 대로 주먹을 내뻗고 발길질을 했다. 곰배는 가소롭다는 듯이 쉽게 나의 주먹을 피했다. 오히려 내가 곰배에게 더 많이 맞고 말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곰배를 밀어내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곰배는 끄덕도 않았다.


   그때, 멀리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 빨리 안 비키나?"


  나의 눈에 마치 성난 소처럼 논을 향해 달려오는 동수가 보였다. 동수는 나를 누르고 있는 곰배를 떼어냈다. 곰배와 치고받고 싸움이 붙었다. 상대가 바뀐 것이다. 둘의 싸움은 막상막하였다. 


  먼저 동수의 코에서 코피가 터졌다. 그러나 동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웠다. 나는 동수가 걱정되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그냥 보고만 있었다. 


  결국 곰배의 눈물이 터지는 바람에 동수의 승리로 싸움은 끝이 났다. 곰배는 울며 집으로 갔다. 동수는 코피를 소매로 쓰윽 닦으며 내게로 걸어왔다. 빙판에 널브러져 있는 썰매를 주워 내게 내밀었다. 


  동수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피가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동수는 나를 보며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나도 동수를 보며 터진 입술로 씨익 웃어 주고는 나의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보였다.


  어제 동수에게서 인터넷 편지가  왔다.  이번 겨울 방학을 하면 꼭 시골에 놀러 오라고 했다. 동수가 나를 위해 앉은뱅이 썰매를 만들어 놓았단다. 빨리 겨울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 동수에게 아재라고 불러야 할까? 아직도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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