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참 어렸다.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빛났고, 마음속 작은 설렘 하나에도 세상이 눈부셔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를 처음 본 건 친구들과 함께 간 음악다방에서였다.
뮤직박스 안, 유리창 너머에서 레코드판을 갈던 손.
깔끔한 셔츠에 차분한 표정, 한 손엔 음반을 들고 다른 손으론 조심스럽게 바늘을 올리던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잘생겼다기보단 단정하고, 조용하고, 묘하게 끌리는 사람이었다.
그땐 다들 대학 배지를 옷깃에 달고 다녔다.
ROTC 모자나 명찰 하나만으로도 설렘을 품게 만들던 시절.
우리는 신청곡을 써서 내고, 그가 그 노래를 틀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신청곡 메모지가 다시 돌아왔다.
그 종이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는 듯했다.
장난처럼 시작됐던 관심이, 진짜 이야기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와 나는 그렇게 조용히 만났다.
많이 웃지도, 많이 말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우리는 함께 걷는 걸 좋아했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건너고, 다리 위를 천천히 걷고, 이름 모를 카페의 조그마한 성냥갑을 하나둘 모았다.
기억 속의 나는, 늘 설레어 있었다.
그를 기다리던 시간조차 소중했고, 그와 함께 앉은 벤치의 나무 결까지 마음에 새겨지곤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감정도 시간 앞에 흔들렸다.
그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견뎠다. 시간이흘러그가 휴가를 나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주한 우린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행동도 뭔가 경직되어 있었고 우리가 항상 만났을 때완 다른 느낌 그리고 불안감이 들었다. 그의 손끝에 낯선 반짝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내 눈은 자꾸만 그의 손에 멈추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말려들었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무너졌다.
말은 없었지만, 우린 서로 알았다.
끝이라는 걸.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잘살라는 말조차도 하지 못했다.
다만, 너무 아름다웠기에 아플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생각이 난다.
그 시절의 나,
가장 진심이었고, 가장 아끼고 사랑받았던 시간이었다. 그 감정은 지금도 조용히 내 안에 숨 쉬고 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그때의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도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 사랑은, 내 안의 시절 중 가장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