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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07. 2023

해변 달리기

   해변을 달리는 기분이란 한결같아서 답답했던 기분이 시원하게 뚫린다. 넘실대는 파도 소리가 쉴 새 없이 다른 박자로 재생되고 수평선 끝에 걸린 구름이 새초롬하게 멈춰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기니까.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가 무거워져서 멈춰도 상관없다. 잠시 쉬었다 다음에 달리면 그만. 바다는 언제나 그곳에 머물며 끝없이 뻗어 있을 테니까. 



   아직도 첫 해변 러닝이 선명하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수다 떠는 걸 더 좋아했던 내가 러닝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우습기 때문이다. 22살, 당시 나에게 해변 러닝이란 바다 앞에 사는, 속된 말로 잘 사는 사람들의 특권 같았다.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그렇잖아. 그런 어린 마음에 해운대 사는 부잣집 아들 흉내라도 내고 싶었는지 해운대로 향했고, 막무가내로 달렸다. 



   그렇게 인생 첫 러닝에서 인대가 아작 나버렸다.



   원래 목표는 끝에서 끝, 왕복 한 번이었다. 변변한 운동 경험이 없던 흐물흐물한 육체 상태를 잘 알았기에 그 이상은 힘들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자아도취라는 변수는 예상치 못했다. 햇살 머금은 바다가 금빛으로 일렁거리는 어느 봄날의 토요일 오후 1시. 저마다의 여유를 발끝에 묻히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거친 숨소리로 요리조리 피해 달리는 내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물론 주인공은 나. 그렇게 3번을 꾸역꾸역 왕복하고 이주일을 누워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왼쪽 무릎이 안 좋지만, 러닝은 꾸준히 하고 있다.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누군가의 특권이 아니라 나만의 일상이 되었고, 보여주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달린다. 엔진이 갈 수 없는 곳을 달리고, 엔진이 갈 수 있는 곳도 달린다. 피가 세차게 온몸을 흐르고, 수천만 개의 땀구멍이 열렸다 닫치는 에너지로 다리를 굴린다. 그럼 2기통 콧구멍에서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배기가스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삶은 단거리가 아닌, 결국 내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장거리 마라톤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낀다.



   처음부터 빨리 달리려고 힘주면 금세 숨이 차고 만다. 그럼 속으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목표했던 거리를 낮추려 든다. 그러니까 처음엔 천천히. 시작이 느리다고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는다. 옆을 스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어느 속도 달리는지, 왜 달리는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관심 없다. 목표했던 거리를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낮춰버리면 자신에게만 부끄러울 뿐. 자신을 속이는 건, 남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거니까 처음엔 천천히 달리며 체력과 힘을 아껴 둬야 한다. 



   그렇게 천천히 달리다 몸과 호흡이 풀렸다 싶을 때 서서히 속도를 올린다. 그 미세한 속도 조절도 달리는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감각이다. 그때부턴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눈은 바다를, 귀는 파도 소리를 수집한다. 머리로는 어제 일을 되짚으며 잘한 것과 못한 것을 나누고, 잘한 것을 토대로 내일을 계획한다. 자아도취를 위한 보여주기식 러닝이 아닌, 보고 듣고 생각하며 달린다.



   그렇게 목표한 거리에 도달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천천히 100m 정도 빠르게 걸으며 숨을 가다듬곤 딱, 멈춘다. 달린 만큼 쉬는 법도 알아야지. 사진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편의점에서 이온 음료 마시는 시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음에 또 달리려면 멈추는 법도 알아야 한다. 안 그럼 또다시 다치고 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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