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큰둥했던 차를 비누로 만드는데 성공하여, 차 비누의 압도적인 사용감에 반해 차를 즐기는 취미가 돌아왔음은 물론, 더 나아가 차 비누 자체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차 비누와 함께하는 기행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벌써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자스민 넥타 녹차 비누에 이어 다음은 어떤 차를 비누로 만들지 이리저리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좋을 것 같은 후보들이 많아 행복하고 치열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그 다음 단계를 딛게 해준 건 다름 아닌 가족의 초월적인 아이디어였다. 차 비누와 차 비누를 합치는 것. 하나의 비누에 두 개의 차가 들어가서, 하고 싶은 차를 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차와 비누를 합쳤으니 이번에는 차 비누와 차 비누를 합치는 건 어떨까.
가족은 일명 반반 비누를 나에게 제안했다. 그야말로 내 고민을 해결함과 동시에 그 너머로 나아가게 되는 획기적이고 초월적인 방안이었다! 반반 비누라니,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가족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돌리며 다음 비누로 만들고 싶은 두 개의 차를 엄선했다.
바로 스미스티의 No.72 화이트 페탈 백차와 A.C.퍼치스의 핑크가든 티가 그 주인공들이다.
화이트 페탈 백차(우) & 핑크가든 티(좌)
스미스티의 No.72 화이트 페탈 백차는 중국의 full leaf 백차, 오스만투스 꽃, 이집트의 캐모마일 꽃잎, 천연 캐모마일 향료까지 들어간 차다. No.72는 화이트 페탈 찻잎 1온스에 들어있는 꽃잎의 수를 뜻한다고 하니 스미스티의 우아한 넘버링 센스가 돋보였다. 앞서 자스민 넥타를 설명할 때 스미스티에 대해 대략적으로 개괄했기에 티 브랜드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스미스티의 No.72 화이트 페탈 백차. 녹차 라인인 만큼 녹색 카튼에 담겨 있고, 개별 포장된 고급스러운 봉투 겉면에 자세한 소개가 영문으로 적혀있다.
화이트 페탈은 마시면 마실수록 인상이 더욱 좋아진 차였다. 마치 만남을 거듭하면 할수록 진면목이 드러나는 오랜 친구였달까. 그래서 처음 시음했을 때보다 시간이 최근에 가까울수록 더 좋았는데, 특히 차 비누로 인해 차에 대한 애정이 다시 샘솟게 된 후로 이 차를 음미했던 때가 가장 감미로웠다. 진하게 우리면 우릴수록 풍미가 그윽하게 묻어나며, 목서 꽃과 캐모마일 꽃잎이 들어가서인지 백차 고유의 맛보다는 가향차에 가까운 달싹하고 오묘한 맛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마실 때 천도복숭아 향에 가까운 달달한 풍미를 느꼈는데, 특유의 매력이 있는 차였다.
두 번째 주인공인 A. C. 퍼치스 티핸들의 핑크가든 티를 소개하기 앞서, 티 브랜드를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A. C. 퍼치스 티핸들은 187년의 전통을 간직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티샵으로, 덴마크 왕실에 공식적으로 차를 납품하는 덴마크의 국민 티 브랜드다. 덴마크의 제품들을 소개하며 덴마크 라이프 스타일을 표방하는 국내 편집샵인 에디션 덴마크에서 이 티 브랜드의 차를 유통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핑크가든 티는 에디션 덴마크에서만 만날 수 있는 A. C. 퍼치스 티핸들의 차로 Edition Denmark Exclusive 라인의 첫 번째 티다.
A. C. 퍼치스의 핑크가든 티. 화이트 페탈 백차가 녹색 카튼에 샤세로 하나씩 담겨져 있다면, 핑크가든 티는 원료들이 그대로 하얀 미니 틴케이스에 담겨 있다.
핑크가든 티는 카페인 프리로 늦은 시각까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차다. 파인애플비트, 사과비트, 자색당근과립, 장미꽃잎, 무화과 슬라이스, 수레국화 꽃잎, 모란 꽃잎이 들어가며 핑크가든이라는 이름답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연상케한다. 차는 티백 형태가 아니라 하얀 미니 틴케이스 안에 별도의 포장 없이 원료들이 그대로 담겨있었는데, 가까이 맡아보면 달콤하고 화사한 향이 물씬 풍겼다.
이 핑크가든 티를투명한 티포트에 넣고 우려냈을 때의 비쥬얼이 정말 예뻤다. 이름처럼 핑크빛의 찻물이었는데 우려낼수록 아름답고 진한 색을 머금었다. 지금껏 마셔본 차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수색이 예뻤다. 그래서 마시기 전에 잠시 식히는 동안, 영롱한 분홍색을 마음껏 감상하며 운치를 즐기곤 했다.
처음 마셔볼 때 마냥 달콤할 것만 같은 비쥬얼과는 달리 의외로 새콤한 맛이 느껴져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다채롭게 재료들이 블렌딩되어선지 맛은 어느 하나로 치우치지 않고 오묘한 조화를 자아냈다. 꽃차나 과일차라기에는 핑크가든이라는 이름처럼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제3의 맛을 이끌어낸 거 같았다.
이쯤에서 눈치채셨을 수도 있는데, 이전 화에 첨부한 차 사진에서 차가 스미스티의 화이트 페탈 백차였고 그 차를 담은 티포트는 에디션 덴마크의 오리지널 티포트였다. 일종의 이스터 에그였던 셈이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이 두 차들을 너무너무 비누로 만들고 싶어서 무엇을 먼저 차 비누로 만들면 좋을지를 한참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르기가 어려워 결정에 난항을 겪고 있던 차였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가족의 절묘하고 탁월한 아이디어로 둘 다 한꺼번에 비누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두 번째 차 비누인 반반 비누의 구상도. 가족이 스케치했다.
이번 차 비누는 무려 차가 2개나 들어가는만큼 매우 특별하고 고무적이었는데, 그런만큼 더욱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면서 구상했다.
이름은 백차와 허브차 반반 스크럽 꽃 비누로 명명하고, 화이트 페탈 백차와 핑크가든 티가 반씩 들어가는 디자인을 생각했다. 비누는 이층 구조로 백차와 티가 각각 윗층과 아랫층을 차지한다. 특히 자스민 넥타 녹차 비누에서 예상치 못했던 스크럽 효과가 너무 좋았기에, 이번에도 스크럽 효과를 기대하면서 찻잎들을 비누 안에 콕콕 들어가게끔 디자인했다.
비누의 전체적인 컨셉은 플라워 월드로 고안했다. 화이트 페탈에 꽃들이 들어가고, 핑크가든은 정원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꽃들이 만발한 이미지가 이번 비누에 매우 걸맞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향은 이에 어울리게끔 라벤더 오일을 추가했다. 라벤더 향이 은은하고 깨끗하며 우아해서, 두 차와 잘 어우러질 거라 생각했다. 라벤더 오일까지 들어가니 그야말로 아름답고 화사한 꽃들의 향연인 것 같아 완성될 비누가 몹시 기대되었다.
9월 말, 이번에도 가족을 통해 전과 동일하게 S 공방에 주문 제작을 의뢰했다. 실은 9월 초에 완성된 자스민 넥타 녹차 비누가 도착했을 때, S 공방에 안부를 전하면서 화이트 페탈과 핑크가든이 비누 제작이 가능한지도 함께 물어봤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미리 들은 참이었다. 자스민 넥타 녹차 비누가 다 건조되기까지 기다리고, 드디어 개봉해 천상을 만끽하는 동안 다음 기적을 향해서도 차근차근 구상하며 행복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추석 연휴가 지나고 월말이 되었을 때, 이 두 번째 차 비누의 주문 제작을 의뢰했다. 저번처럼 비누 1kg를 주문했는데, 대신 반반 비누라 차가 반씩 들어가기 때문에 저번보다 티백은 적게 들어가게 되었다. 두 번째라선지 주문은 더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날 바로 우체국 택배를 통해 차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