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은 골프채널 중계 피디였다. 봄이 되어 골프 대회가 열리기 시작하면, 장돌뱅이 마냥 전국을 떠돌며, 골프 대회를 생중계하는 일이었다. 대회가 없는 주는 해외 PGA 대회를 중계했다. 골프 시즌이 끝이 나는 겨울엔 레슨물이나, 정보물에 투입되었다. 그래도 겨울이 제일 한가한 시기였다. 방송국 입사 전까지 이제껏 쳐보지도 못했던 운동이 졸지에 삶의 가장 중요한 운동이 되었다. 회사를 들어가기 전에는 골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얀색 공을 막대기로 쳐 홀컵에 넣는 운동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드라마 연출을 꿈꾸었고, 최종 면접 1/3의 확률을 뛰어넘지 못해 좌절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서류 접수만 치면 2,000명 가까이 지원했다고 한다. 그중에 6명의 최종까지 올랐다는 사실도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나도 서류에서 떨어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위치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차이라면, 그렇게 최종에서 떨어진 자원들을 계열사에서 이삭 줍기 하듯 줍줍 주워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눈이 올 무렵 계열사 골프 전문 채널에 연락을 받고, 입사 면접을 진행해 골프 채널 피디가 된 것이다.
참고로 내 동기 7명 중 6명이 모기업의 최종에서 고배를 마신 녀석들이다. 지금까지 생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기는 단 하나. 그 친구가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란다. 한 자리 차지 할 때 회사 놀러 갈 생각이다.
어쩌면 꿈과 다른 방향으로 방송일을 시작했지만, 사회 초년생의 열정은 부족함이 없었다. 모르는 골프는 배우면 되었고, 꿈꾸던 방송국을 다니며, 피디님이라 불리는 게 좋았다. 열심히도 했고 잘하기도 했었다. 사회 초년생의 첫 워크숍. 회사는 홍천에 콘도를 빌려 1박 2일 워크숍을 진행했다. 말로만 듣던 워크숍을 경험할 생각에 마냥 설레었다. 아침에 회사에 모여 홍천으로 달려가 사내 교육과 목표 달성을 위한 간담회 등을 진행했다. 입사 몇 개월의 신입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교육이 끝이 나면 선배들과 워크숍의 꽃이라던 회식을 할 생각뿐이었다. 길고도 긴 오후 간담회가 끝이 나고, 드디어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미리 예약된 고깃집에서 열심히도 굽고, 마시며 선배들에게 질문도 하고 사심 없이 털어놓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설레는 워크숍에 너무도 좋아서였을까? 평소보다 빠르게도 마셨다. 겉으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당시 어느 정도 겁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자~ 이제 어느 정도 술자리를 가졌으면, 다시 회의장에 모여 간담회를 이어 진행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저녁 먹고, 술도 마셨는데 다시 간담회를 한다고? 겁 없는 신입 사원은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할 말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이럴 거면 회사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시지 왜 여기까지 와서 간담회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딸꾹"
스스로 말하고도 놀라 혼자 헉 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순간의 정적과 이어 터지는 동조하는 목소리. 선배들은 신입사원의 똘기를 방패 삼아 간담회를 정리하기를 종용했다. 본부장님께 충성 가득 술잔을 채우며 좀 편하게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좋은 방안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말들로 신입사원의 똘기를 커버해 주시며,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스을쩍 밀어 넣으셨고, 본부장님은 못 이기는 척 숙소에서 간단히 맥주 한 잔 하며 편하게 이야기해보자고 마무리를 하셨다. 역시 사회인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법. 갑자기 죄인에서 스타가 된 신입 사원은 쭈구리가 되어 숙소 구석에 앉아 선배들이 주시는 술을 홀짝홀짝 받아 마셨다.
"그럼 이렇게 마무리하고, 적당히들 마셔요. 내일 아침에 단합 등산이 있으니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오늘 첫 워크숍을 온 신입 사원들 오늘 느낀 점이 무언지 말해 보세요"
나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조금 더 생각이라도 하고 말을 했어야 했다.
"본부장님. 그래도 저희들이 명색이 골프채널 피디인데 아침에 등산이라니요. 저는 골프에 더 친해지는 게 맞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시간만 주신다면 자비로라도 여기 앞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가서 한 번 더 쳐보고 싶습니다."
선배들의 또 한 번의 '이 새끼 뭐지?' 표정.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건 실수가 아니다. 이 녀석 반골이다라는 눈빛으로 겁을 상실한 신입 사원을 쳐다보았다.
"아니.. 골프를 못 쳐도 골프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지. 그래도 골프에 대해 콘텐츠 만드는 데는 충분해"
선배 A가 본부장님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너 내가 진작에 골프 배우라고 했지? 골프를 칠 줄 아는 거랑 모르는 거랑 레슨 프로 만들 때 질문지가 같냐? 다르냐? 칠 줄 알아야 안 되는 포인트가 알지"
선배 A를 타박하는 더 높은 선배 B
"뭐 누구는 치기 싫어 안쳐요? 어디 시간이 돼요? 편집실에 처박혀 나오면 한밤중에 아니면 새벽인데 뭐 회사에서는 골프 치라고 볼 하나를 주길 하나, 장갑을 하나 사주나" 갑자기 회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선배 C
똘기의 신입사원이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가 잔잔했던 사내에 폭풍 같은 물결을 일으켰다. 이제 아무도 신입 사원의 겁대가리 상실한 직언은 잊은 지 오래다. 골프 피디의 자질 중에 골프를 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토론 겸 화풀이 겸 질책이 오고 갔고, 나는 불만 지핀 채 동기들과 구석으로 숨어들어 홀짝홀짝 술을 마시며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개판된 술판을 한차례 돌아본 본부장님이 방을 나가시고도 이 토론은 끝날 줄 몰랐다. 그날의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저녁부터 달린 술자리에 속이 너무 아팠다. 등산이나 가야겠다. 마음먹고 운동화 끈을 질끈 감는데 인사팀의 전달사항이 내려왔다. 아침 운동은 앞의 골프 연습장으로 모이라고. 전달 사항을 듣자마자 싸해진 아랫배 때문에 한차례 곤욕을 치르고 조금 늦게 연습장에를 도착했다. 쭈뼛거리며 7번 아이언을 하나 들고 타석에 들어서려니 선배가 슬쩍 말해 주신다.
아까 본부장님이 너 어디 갔냐고 묻고 가셨다 임마
헐... 제대로 기억에 남으셨나 보다. 하... 앞으로 넙죽 엎드리며 지내야겠다. 다짐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신입사원이 본부장님을 만날 때가 얼마나 많겠는가. 적당히 숨으면 못 찾으실 거 같았다. 정말 찾으신다면 내 앞날은 깜깜하겠지... 자꾸 아이언이 뒤땅을 치는 게 꼭 본부장님 생각 때문은 아니겠지? 하...
우연일 테다.
우연이어야 한다.
그 이후로 내가 퇴사를 할 때까지 신입사원 때처럼 1박 2일로 떠나는 워크숍은 없었다.
지금 내가 당시 본부장님 나이가 되었다. 나같은 신입 사원을 맞이했던 본부장님의 두통이 세월을 거슬러 내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래도 아마 귀엽게 봐주셨지 않을까? 시간을 거슬러, 당시 당돌했던 신입을 이해해 주세요. 지금이라면 아마 조금은 더 돌려서 말했을거에요. 그래도 아마 내용은 변하지 않을 거 같네요 본부장님.